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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깨진 단지를 눈으로 찬찬히 확인하는 순간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어찌 떨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단지의 임자가 욕쟁이 함경도 할머니임에 틀림없음에랴! 이 베락 맞아 뒈질 놈의 아새낄 봤나, 하는 욕설이 귀에 쟁쟁해지자 등 뒤에서 올라온 뜨뜻한 열기가 목덜미와 정수리께를 휩싸며 치솟아 올라 추운 줄도 몰랐다. 눈을 비비고 또 비볐지만 이미 벌어진 현실이 눈앞에서 사라져 줄 리는 만무했다.
집 안팎에서 귀청이 떨어져라 퍼부어질 지청구와 매타작을 감수하는 게 상수인 듯싶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첫길이라고 일부러 발끝에 힘을 주어 제겨 딛고 가느라 우리 집 앞에서 변소 앞까지 뚜렷이 파인 눈 위의 내 발자국은 요즘 말로 도주 및 증거 인멸의 가능성을 일찌감치 봉쇄하고 있는 터였다. <중략> 나는 울기 전에 최후의 시도를 하기로 맘먹었다. 우랑바리나바롱나르비못다라까따라마까뿌라냐……
손오공이 부리는 조화를 기대하며 입속으로 주문을 반복해서 외었다.
[중략 부분의 줄거리] 눈사람을 만들어 깨진 단지를 숨기고, 혼날 것을 두려워한 나는 가출을 한 후 여러 곳을 방황하다 해질녘에 집으로 돌아온다. 눈사람은 깨끗이 치워져 있었고, 혼낼 줄로 알았던 집 안 사람들은 나에게 무심한 채 평소와 다름없이 자신들의 일만 한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가 너무도 낯설게 느껴졌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하고 실제 세계 사이에는 이렇듯 머나먼 거리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그 거리감은 사실이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그러므로 나는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프레한 깨달음에 속한 것이었다. <중략>
그러고는 어른처럼 땅을 쿵쾅거리며 뛰쳐나와 이 골목 저 골목을 헤집으며 어딘가를 향해 가슴이 터져라고 마구 달리고 또 달렸다. 그렇게 컸다.
-김소진,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이 소설에서도 ‘깨진 단지’는 ‘나’에게 정신적 성장의 계기가 되는 소재이다. 그것을 ‘눈사람’ 속에 은폐하고 가출했다 혼날 것을 걱정하는 ‘나’의 모습은 미성숙한 어린 아이의 모습이다. 그랬던 ‘나’가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인식하면서 각성하고 성찰하는데, 결국은 ‘세계는 나와는 상관없이 돌아간다는 깨달음’, ‘나는 결코 주변으로 둘러싸인 중심이 아니라는 아슴프레한 깨달음’을 얻는다. 그러한 ‘나’와 관련하여 ‘그렇게 컸다’라고 한 것은 성인이 된 주인공이 어린 시절의 자신을 떠올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이런 표현을 사용하면 대상을 부각하는 효과와 함께 독자로 하여금 특정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여기에서는 그 표현들이 ‘나’의 행동과 심리가 유치하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 이용되고 있다. 실제로 ‘나’가 한 것이라고는 ‘손오공이 부리는 조화를 기대하며 … 주문을 반복… 눈사람을 만들어 깨진 단지를 숨기’는 것이다. 그것을 멋지고 어려운 한자어로 표현한 것에 독자들은 웃음을 느낄 것이다.
세계는 둘로 나뉠 수 있다. 자아와는 관계없이 존재하는 객관적 세계와, 자아가 인식하는 주관적 세계이다. ‘내가 짐작하고 또 생각하는 세계’는 주관적 세계이고, ‘실제 세계’는 객관적 세계이다. 두 세계는 같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은 다르다. 미성숙할수록 두 세계를 구별하지 못한다. 여기에서도 ‘나’는 그전까지 세계를 주관적으로만 인식했는데, 객관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깨달았으니, 정신적 성숙을 한 것이다.
객관적 세계, 주관적 세계, 자아 등의 관계는 자주 나오는 개념이므로, 이해해 두면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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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신체 반응이나 변화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파악할 줄 알아야 한다.
③ 대상을 멋진 말이나, 전문 용어, 한자어, 어려운 말 등으로 굳이 바꿔 말하는 경우 특정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느껴보자.
④ 객관적 세계, 주관적 세계, 자아 등의 관계를 이해해 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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