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 워낙 넓은 미국에선 지방자치 제도가 잘 발달해 있습니다. 주(州)정부 권한이 막강해 연방정부조차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요. 올 상반기 인종차별 시위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했을 때 트럼프가 여러 주를 상대로 ‘치안 유지 권한’을 발동하도록 촉구했으나, 민주당 주지사가 장악한 주에선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뉴욕주 의회가 29일(현지시간) 집세를 내지 못해 한겨울에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뉴욕 세입자들을 보호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연방정부의 부양책 법안과 별도로, 뉴욕주 세입자들이 최소 2개월, 최장 4개월 동안 살던 집에 계속 머물 수 있도록 한 겁니다. 발효 시점은 ‘즉시’입니다.
현재 뉴욕주 주민의 8%는 실업 상태입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두 배 이상 높은 수치이죠. 이 때문에 임차료를 밀린 뉴욕주 세입자가 120만 가구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습니다.
법안 통과 후 앤드루 쿠오모 뉴욕주지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 코로나19 사태에 따라 실직하면서 쫓겨날 위기에 놓인 취약계층을 보호할 수 있게 됐다”고 강조했습니다.
뉴욕주는 미국 민주당의 텃밭입니다. 대선 후보 잠룡으로 평가돼 온 쿠오모도 민주당 소속으로, 2011년부터 4년 임기의 지사직을 연달아 수행해 왔지요. 그의 부친(마리오 쿠오모) 역시 세 번의 임기를 채운 뉴욕 주지사였습니다.
서민 보호를 내세우는 민주당이지만 이번 법안에 임대인 지원책이 포함돼 있는 점이 눈길을 끕니다. 세입자 못지 않게 임대인들 또한 코로나 사태의 직접적인 피해자라는 인식을 한 겁니다.
법안은 10채 이하의 주택을 소유한 임대인들이 월세 수입 감소로 어려움에 놓여 있다는 점을 감안해 차압을 피할 수 있도록 명시했습니다. 은행 등 금융회사들이 이들을 상대로 강제 집행 조치를 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규정한 겁니다.
또 세입자를 무조건 보호하는 것이 아니란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새벽 3시에 시끄러운 음악을 틀어놓는 등 이웃에 피해를 끼칠 경우엔 법원 명령을 받아 세입자를 즉각 쫓아낼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세입자들이 언제까지나 밀린 월세를 내지 않을 수도 없습니다. 뉴욕주에선 내년 5월 1일부터 강제 퇴거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그동안 밀린 집세를 모두 갚아야 합니다.
세입자 주거안정 조치를 취할 때도 한 쪽의 일방적인 희생만 강요해선 안 된다는 게 뉴욕주의 판단입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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