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우의 수가 많은 시나리오 경제 전망은 상황이 그만큼 유동적이란 의미다. 기업 역시 시나리오 경영으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대응하고 있다. 자칫 실기하거나 과소·과잉 반응을 했다간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이런 위기가 오면 오히려 더 성장하는, 이른바 ‘앤티프래질(antifragile)’ 기업이 꼭 나타난다는 역사적 교훈이다. 분야가 달라도 앤티프래질 기업은 공통적인 위기 돌파 공식을 갖고 있다. 구조조정으로 생존력을 키우는 동시에 선행적 투자로 기회를 찾아낸다.
다행히 지금의 한국 기업은 과거의 한국 기업이 아니다. 연구개발(R&D)투자 100조원 시대가 그 상징적인 지표다. 80조원에 육박하는 기업 R&D투자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기업 R&D투자는 설비투자를 따라갔다. 지금은 반대다. 선진국 기업의 성장 코드대로 R&D투자가 후속투자를 이끄는 선행지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한국 기업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해 위기 때 경쟁력을 높이면 단기간에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할 수 있다는 경험도 얻었다. 위기에도 R&D투자를 감행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기업평가사이트 CEO스코어가 국내 500대 기업 중 R&D를 공시하는 217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지난해 3분기까지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줄었는데도 R&D투자는 늘었다. 정보기술(IT)·전기전자·자동차·바이오·제약 등이 R&D투자를 끌어올렸다.
대내외 환경 악화로 올해는 기업 R&D투자가 감소할 것이란 전망도 있지만, 기회를 포착한 기업이라면 R&D투자를 줄일 이유가 없다. 인공지능(AI) 분야가 대표적이다. LG그룹은 16개 계열사가 참여하는 AI연구원을 출범시켰다. 먼저 출범한 삼성리서치와 경쟁하는 구도다. 전자산업처럼 삼성·LG가 AI 경쟁을 벌이면 그 파급효과는 상당할 것이다. 카카오·SK텔레콤·삼성전자 간 ‘AI R&D협의체’도 좋은 신호다. 이런 움직임이 AI투자의 기대수익률 증가로 읽힌다면 전체 산업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 문제다. 미국·중국이 AI투자를 이끌고 있지만 코로나 국면을 틈타 한국이 약진하지 말란 법도 없다.
거시경제 전망이 아무리 답답해도 신산업에 뛰어드는 기업이 많아지면 경제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단 하나, 다른 나라와 달리 걱정되는 것은 정치다. 김영삼 정부 때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우리나라 행정력은 3류, 정치력은 4류, 기업 경쟁력은 2류”라고 했다가 혼이 난 적이 있다. 기업규제 비판이 정치권력에 대한 기업인의 도발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1류 기업은 속속 나오고 있지만 정치·행정은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올해는 내년 3월 대선이 있어 정치적 불확실성이 최고조에 달할 전망이다. 한국 기업의 발목을 잡을 가장 큰 위협요소다. 그래도 기업은 달려야 한다. 권오현 삼성전자 고문이 《초격차》에 이어 《리더의 질문》을 쓴 이유가 잡힌다. 한국 경제의 미래는 가망 없는 ‘정치인 리더십’이 아니라 도전하는 ‘기업인 리더십’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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