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가 다음달부터 2개월간 일평균 100만배럴을 덜 생산하기로 자진해 나섰다. 주요 산유국 카르텔에서 홀로 생산량을 줄이면서도 다른 산유국에 감산에 동참하라고 요구하지도 않고, 감산량은 비밀에 붙이다 '깜짝 공개'했다. 전문가들은 이같은 이례적 움직임에 "사우디는 다 계획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OPEC)은 지난 5일 성명을 통해 OPEC+가 2~3월 원유를 기존 계획보다 덜 생산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OPEC+는 OPEC 소속 13개국과 러시아 등 비(非)OPEC 주요 산유국 10곳의 연합체다.
OPEC+는 당초엔 다음달부터 일평균 580만배럴을 감산할 계획이었다. 2월엔 이달 대비 140만배럴을 더 생산한다는 의미다. 이를두고 러시아는 OPEC+의 기존 합의대로 다음달부터 감산량을 대폭 축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사우디는 감산 유지를 고집했다.
합의 끝에 OPEC+는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만 증산을 허용하기로 했다. 러시아는 오는 2~3월 두달에 걸쳐 매달 산유량을 일평균 6만5000배럴씩 늘린다. 같은 기간 카자흐스탄은 매월 하루 1만배럴씩 더 생산한다.
언뜻 보면 사실상 '나홀로 증산'을 이뤄낸 러시아의 승리지만 실상은 아니라는게 주요 외신들의 평가다. WSJ는 "러시아가 받아낸 증산량은 지난해 세계 수요의 0.0075% 수준"이라며 "그저 '체면치레 양보'를 받은 것"이라고 분석했다.
말렉 부문장은 "이번 조치로 단기적으로는 사우디의 원유시장 점유율이 좀 떨어지겠지만, 시장에 미치는 사우디의 영향력이 여타 산유국과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이란 것이 부각됐다"며 "사우디가 여차하면 생산량을 마음대로 조절할 여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줬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WSJ 등에 따르면 사우디는 합의에 앞서 각국 협의대표단에 러시아 등이 원유를 일부 증산해도 사우디가 감산을 더해 증산분을 상쇄하겠다고 알렸다. '러시아 등은 상황이 어려울지 몰라도, 사우디는 충분히 감산을 견딜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사우디 감산 규모는 러시아 증산분보다 훨씬 많다. 여기다 사우디는 자체 감산 규모를 다른 OPEC 회원국이나 러시아 등에 미리 공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WSJ는 "사우디는 최근 몇년간 석유 시장 지배력의 일부를 러시아에 뺏겼다"며 "이번 기회에 대규모 감산을 공개해 국제 유가도 떠받치고, 한편으로는 원유시장에서 힘을 과시하는 '플렉스'를 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OPEC+이 원유를 적게 생산하는 것은 미국 셰일업계에만 좋은 일이라는게 러시아의 주장이다. OPEC+가 에너지가격을 떠받치는 동안 셰일기업들이 생산을 늘릴 수 있어서다. 반면 사우디는 미국 셰일업계에 일부 이득이 되더라도 OPEC+이 공급을 줄여야한다고 보고 있다.
사우디의 자진 감산 발표가 나온 당일에도 미국 셰일기업이 반사이익을 얻었다. 이날 미국 증시에서 셰일 시추·생산 부문 S&P지수는 9.3% 급등했다. 미국 최대 셰일기업 EOG리소스 주가는 11% 올랐다.
이같은 이유에 러시아는 사우디에 자체 감산조치를 말아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블룸버그통신은 "알렉산드르 노박 러시아 부총리가 사우디의 감산 발표에 기자들 앞에선 '석유산업에 멋진 새해선물'이라고 말했지만, 앞서는 압둘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장관에게 자체 감산 조치를 하지 말아달라고 비공개 요청을 했다"고 보도했다. 노박 부총리는 작년까지 러시아 에너지장관을 지냈다.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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