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등 설치 유무와 상관없이 운전자는 횡단보도 앞에서 일시정지 하는 등 보행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교통사고를 냈다면, 보험 가입 여부와 상관 없이 처벌받을 수 있다는 취지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교통사고처리 특례법(교특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A씨의 상고심에서 ‘1심 파기환송’을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8일 밝혔다.
택시기사 A씨는 2019년 4월 서울 송파구의 한 도로에서 7세 아이를 들이받아 전치 2주의 부상을 입혔다.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서 사고가 발생했다.
검찰은 A씨를 교특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는데, 교특법에선 과실로 사고를 낸 차량이 운전자 보험이나 공제에 가입해 있으면 재판에 넘기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교통사고 피해를 신속히 회복하기 위한 취지다. A씨의 택시는 택시공제조합에 가입돼 있었다.
하지만 교특법에선 ‘횡단보도에서의 보행자 보호의무 위반’ 등 운전자에게 중과실이 있는 경우를 예외로 규정해, 재판에 넘길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재판 과정에선 A씨에게 피해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었는지 여부가 쟁점이 됐다.
1심은 공소 기각 판결을 내리고 A씨 손을 들어줬다. 도로교통법에선 운전자에게 ‘횡단보도 앞’에서의 일시정지 의무를 부과하고 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사건은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에 A씨 차량이 먼저 진입해 진행하던 중 갑자기 횡단보도에 진입한 보행자와 충돌해 발생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어 “보행자가 신호등의 지시에 따라 횡단한 때에는 (차량의) 진입 선후를 불문하고 운전자에게 일시정지 등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다고 할 것이지만, 사고현장엔 신호등도 없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2심은 A씨가 ‘보행자 보호 의무’를 위반한 게 맞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도로교통법의 입법 취지가 ‘보행자의 생명·신체의 안전을 두텁게 보호’하는데 있는 만큼, 신호등이 없는 횡단보도를 건너는 보행자가 있을 때에도 운전자가 (차량의) 진입선후를 불문하고 일시정지 해야 한다고 봤다.
재판부는 “교통사고 현장의 횡단보도는 신호등이 설치돼 있지 않아 언제든지 보행자가 횡단할 수 있는 곳이었다”며 “A씨는 횡단하는 보행자가 있는지 확인한 후 차량을 운행해야 했다”고 말했다. 항소심은 해당 사건이 공소제기가 가능한 사안인 만큼, 사건 심리가 필요하다며 1심으로 파기환송했다.
A씨 측은 상고했지만 대법원도 2심 판단이 옳다고 봤다. 대법원은 “운전자가 보행자보다 먼저 신호등이 설치되지 않은 횡단보도에 진입한 경우에도, 보행자의 횡단을 방해하지 않거나 통행에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상황이 아니고서는 차를 일시정지 하는 등으로 보행자의 통행이 방해되지 않도록 할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
이인혁 기자 twopeople@hankyung.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