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책임 없는 사과는 불공평하다

입력 2021-02-14 18:23   수정 2021-02-15 00:15

최고의 겨울 스포츠로 각광받는 프로배구계가 흉흉하다. 선수들의 잇단 학교폭력(학폭) 사건 때문이다. 여자 프로배구 흥국생명의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는 중학교 시절 학폭 의혹이 제기된 이후 팀 숙소를 떠난 상태다. 두 선수는 SNS를 통해 학폭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했지만 또 다른 피해자의 추가 폭로까지 나와 후폭풍이 거세다. 남자프로배구 OK금융그룹 레프트의 송명근·심경섭 선수도 중·고교 시절 학폭 의혹이 제기되자 가해 사실을 인정하고 구단을 통해 사과했다.

프로배구와 선수들의 높은 인기만큼이나 충격은 크다. 철없던 시절의 잘못이라고만 하기에는 폭언, 폭행, 금품 갈취, 가혹 행위 등 죄질이 나쁘다. 당사자들의 사과에도 불구하고 팬들의 실망과 분노가 수그러들지 않는 이유다. 이들 선수의 배구계 퇴출을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까지 등장했다.
사과에는 책임이 따른다
이재영·이다영 선수의 경우 방송·광고에서도 퇴출되는 분위기다. 이들이 출연했던 TV 프로그램 영상과 광고는 다시보기 서비스에서 삭제되거나 비공개 처리됐다. 소속 구단이 검토 중인 징계 수위에도 팬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어쩌면 까맣게 잊고 살았을지도 모를 소싯적 잘못으로 인해 이들이 치러야 할 대가는 치명적이다.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유명 인사, 공인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처하는 자세다. ‘사과’가 넘쳐나는 세상이다. 포털사이트에 ‘사과’라고 검색하면 과일 사과에 관한 기사는 가뭄에 콩 나듯 한다. 하루가 멀다고 누가 어떤 잘못 때문에 사과했다는 뉴스가 나온다. 연예인, 유튜버, 인플루언서들의 사과는 일상사가 된 지 오래다. 막말과 혐오, 비하 발언 등 부적절한 언사부터 뒷광고, 음주운전, 층간소음 시비 등에 이르기까지 사과하는 이유도 각양각색이다.

연예인을 비롯해 대중적 인기를 먹고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사과와 함께 나름의 책임을 지게 된다. 사안이 가벼우면 사과로 그치지만 일정 기간 활동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손실도 감내한다. 출연 중인 프로그램에서 하차한 배우, 월 수억원의 매출을 포기한 유튜버도 많다. 자의든 타의든 사과와 함께 일정 부분 책임을 지는 셈이다.
정치인은 책임에서 예외인가
정치인과 일부 공직자는 이런 책임에서 예외인가. 사법부의 독립성을 스스로 저해하고 거짓말까지 한 사실이 드러나 사과한 김명수 대법원장이 그렇고, 갖은 의혹에도 사과 한마디로 국회 청문회를 통과한 황희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그렇다. 대법원장으로선 치명적인 과오인데도 스스로 사퇴할 의사는 없어 보인다. 문체부 장관은 국회 본회의 기간 중 부적절한 스페인 가족여행, 60만원 생활비 논란, 논문 표절 의혹 등 숱한 문제가 제기됐지만 가족여행에 대해서만 사과했을 뿐이다. 숱한 의혹 속에서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약점은 묻혀버렸다.

황 장관은 이 정부가 야당의 동의 없이 임명한 29번째 장관급 인사다. 일일이 기억하기도, 거론하기도 힘들 만큼 많은 후보자가 온갖 의혹 속에서도 높은 자리를 꿰찼다. 청문회는 요식 행위로 전락했고, 의혹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경우에는 마지못해 사과하면 됐다. 그에 따른 책임은 없다.

프로배구 선수들의 학폭 논란과 사과를 보면서 사과의 불공평함을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것일까. 연예인이든 프로선수든 정치인이든 공직자든 대중 앞에 공개된 ‘공인’이라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누구는 책임을 지고 누구는 사과만으로 끝난다면 불공평하지 않은가.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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