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사는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 최종 판결 이전까지 수차례 협상했지만 배상금 규모와 영업비밀 침해 여부를 두고 평행선을 달렸다. LG 측은 2조5000억~3조원을 요구했지만 SK는 1조원 이상 줄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ITC가 SK이노베이션의 리튬이온배터리에 대해 미국 생산과 수입을 10년간 금지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주도권은 완전히 LG 쪽으로 넘어갔다. 10년 수입금지 조치는 소송을 제기한 LG 측도 놀랄 정도의 중징계였다. 최종 판결 이후 보다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재개하려던 SK의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SK는 2018년 이후 총 3조원을 투자한 미국 조지아주 1, 2공장을 계속 가동하려면 서둘러 수입금지 조치를 풀어야 한다. ITC가 내린 최종 결정의 효력은 60일 이후 발생한다. 민사소송인 ITC 소송은 최종 결정 이후에도 양사가 합의하면 즉시 소송 결과를 되돌릴 수 있다. SK는 이 ‘골든 타임’ 안에 반드시 합의를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이다.
SK는 ITC 최종 결정 이후 60일 내에 미국 대통령이 자국 산업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에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있다. 하지만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지금까지 특허 침해가 아닌 영업비밀 침해 건에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선례가 없다. 여기에 ITC가 SK 배터리 고객사인 포드 폭스바겐의 미국 공장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각각 2년과 4년의 유예기간을 부여함으로써 대통령이 ‘자국 내 산업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울 가능성마저 사라졌다.
LG는 콘퍼런스콜에서도 ‘진정성 있는 자세’를 수차례 강조했다. 한웅재 LG에너지솔루션 법무실장은 “미국 ITC의 결정을 근거로 유럽 등 다른 지역에서 SK이노베이션을 상대로 추가 소송을 제기할지도 전적으로 SK의 자세에 달렸다”고 말했다.
양측의 배상금 격차도 조기 합의를 위해 넘어야 할 관문이다. 투자은행(IB) 크레디트스위스는 ITC 최종 결정 이후 보고서에서 “합의금이 5조원 이상 될 것으로 보이며 합의가 안 되면 LG가 유럽에서도 소송을 진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조건만 맞춰진다면 LG 측도 합의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LG가 가장 원치 않는 시나리오는 SK가 수주했던 미국 내 폭스바겐과 포드의 배터리 물량이 중국 및 일본의 경쟁업체로 넘어가는 것이다. 정세균 국무총리도 최근 “한국 기업끼리의 싸움은 남 좋은 일만 시키는 것”이라고 우려한 바 있다. 정치권의 압박과 ‘국익을 해쳤다’는 여론을 피하기 위해서도 합리적인 선에서 합의하는 게 LG에도 유리할 것이란 분석이다. LG의 고객사이기도 한 폭스바겐과 포드가 합의를 종용하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LG에너지솔루션은 ID.4(유럽 모델), 이트론 등 폭스바겐 주력 모델에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SK가 이전보다 전향적인 자세로 나올 것으로 예상되지만 결국엔 양사 오너의 결단 없이는 조기 합의가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최만수 기자 beb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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