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범석 쿠팡 창업자(이사회 의장·사진)가 미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을 위한 신고서를 제출하면서 막판까지 고심을 거듭한 문서가 있다. ‘파운더스 레터(창업자의 서신)’다. 김 의장이 쿠팡의 공모가를 정할 글로벌 기관투자가들과 미 증권거래위원회(SEC)에 보낸 것으로, 상장 이후에도 반드시 지켜야 할 경영 약속을 담은 문서다. 2페이지짜리 편지를 작성하기 위해 김 의장과 쿠팡의 경영진은 밤잠을 설쳐가며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는 후문이다.
국내 유통업계는 쿠팡의 뉴욕 직상장이나 기업가치 평가액보다 이 서신 내용을 더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쿠팡이 해외 진출 자금 마련을 위해 상장하려 한다는 예상을 깨고 한국 전자상거래(e커머스)시장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을 처음 드러냈기 때문이다. 쿠팡을 중심으로 온·오프라인 대형 유통사들 간 치열한 생존경쟁의 서막이 열렸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글로벌 ‘큰손’들이 투자한 만큼 글로벌 자본시장의 본산에서 가치를 평가받겠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아마존, 테슬라처럼 번 돈을 신규 사업에 재투자함으로써 거대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안정적인 자금 조달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 특유의 규제를 피하기 위한 전략이라는 시각도 있다. 쿠팡은 SEC에 제출한 신고서에서 김 의장은 주주 중 유일하게 클래스B 보통주라는 ‘슈퍼 주식’을 받게 된다고 밝혔다. 클래스A 보통주보다 의결 권한이 29배 많은 주식이다. 이 같은 차등의결권은 적대적 인수합병(M&A) 등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하기 위한 것으로 한국엔 없는 제도다.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배송 실험’이 쿠팡의 경쟁력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김 의장은 ‘창업자 서신’에서 “쿠팡 성장의 중대한 분수령은 전국에 걸쳐 자체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새벽배송에 이어 추가 투자를 통해 ‘그날 배송’을 실현함으로써 기존 유통, 물류산업의 판을 뒤집겠다는 전략이다.
지난해 10월 투안 팸 전 우버 최고기술책임자(CTO)가 쿠팡에 합류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팸 CTO는 쿠팡에서 김 의장(158억원)보다 많은 연봉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다. 복잡하고 거대하며, 기술로 무장한 한국에서 디지털에 기반한 ‘모빌리티 실험’을 하고 싶다는 게 팸 CTO가 밝힌 이직의 변이다.
쿠팡의 최대 주주인 소프트뱅크비전펀드가 보유한 기업 목록엔 글로벌 모빌리티 서비스 업체가 다수 포함돼 있다. 중국 디디추싱의 자율주행 관련 자회사인 디디워야, 로봇업체 브레인, 자율주행기술 개발기업인 크루즈, 뉴로 등이다. 투자업계 관계자는 “자율주행이 적용될 최적지는 정해진 경로로 움직이는 배송차량”이라며 “로봇을 활용한 물류도 쿠팡의 향후 지향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유통업체 관계자는 “쿠팡의 지난해 현금흐름이 플러스였다는 것에 깜짝 놀랐다”며 “영업과 금융 등으로 조달한 돈을 투자로 쏟아부을 수 있는 데다 추가 자금이 들어오는 것인 만큼 국내 유통산업은 ‘쩐의 전쟁’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물류업체들도 곤란한 상황에 처하긴 마찬가지다. 쿠팡은 현재 10여 개인 대규모 풀필먼트센터를 7개 정도 더 늘릴 계획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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