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민주당이 18일(현지시간) 불법체류자 1100만 명에게 8년 뒤 시민권 획득 길을 열어주는 파격적 이민법안을 공개했다. 법안이 통과되면 16만 명가량으로 추정되는 미국 내 한국인 불법체류자도 혜택을 볼 수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공약을 반영한 이 법안은 불법체류자 단속과 추방을 강화한 도널드 트럼프 전 행정부의 반(反)이민 정책 기조를 180도 뒤집는 것으로 평가된다.
법안은 미국에 불법체류 중인 이들에게 8년 후 시민권을 얻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게 핵심이다. 대상자는 올해 1월 1일 이전 미국 내 거주자다. 신원 조회 통과, 세금 납부 등의 요건을 충족하면 5년 뒤 영주권을 신청하고, 그로부터 3년 후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특히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 유예(DACA)’ 조치 대상인 일명 ‘드리머(Dreamers)’는 즉시 영주권을 받고, 3년 뒤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다. 일종의 ‘패스트 트랙’을 적용하는 것이다. 드리머는 부모를 따라 어린 시절 미국에 와 불법체류하는 이들을 말한다.
미국 내 불법체류자는 중남미 출신이 대부분이지만 한국인도 적지 않다. 사회조사기관인 퓨리서치는 미국 내 한국인 불법체류자 수를 2014년 기준 약 16만 명으로 추산했다.
CNN은 “이번 법안은 마지막 이민 개혁 시도가 이뤄진 2013년 이민법안의 13년보다 시민권 획득 기간을 8년으로 단축해 (이민 개혁 측면에서) 더 진일보했다”고 평가했다. 가족·취업 이민비자의 국가별 상한을 올리는 방안도 법안에 포함됐다. 밥 메넨데스 민주당 상원 외교위원장과 린다 산체스 민주당 하원의원이 법안을 공동 발의했다.
미국에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인 1986년 300만 명의 미등록 이민자를 합법화한 이후 시민권 획득을 허용하는 대규모 이민법안이 통과된 적이 없다. 이번 ‘바이든표’ 이민법안이 의회를 통과하면 35년 만에 대대적인 이민 개혁이 이뤄지는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임기 초반 이민법안을 서둘러 내놓는 것은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실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고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분석했다. 변수는 공화당의 반대다. 특히 상원에서 필리버스터(무제한 반대토론)를 막기 위해선 전체 100명 중 60명 이상의 찬성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공화당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상원은 민주당과 공화당이 각각 50석을 양분하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성명을 통해 이번 법안에 대해 “민주당이나 공화당의 우선순위가 아니라 미국의 우선순위”라며 “의회 지도자들과 협력하길 고대한다”고 밝혔다. 백악관 당국자도 브리핑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상원에 36년 있었다”며 “법안이 발의될 때와 마지막에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고 말했다. 공화당과 협의 과정에서 이민법안을 수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한동안 주춤했던 중남미 이민자들의 미국행은 다시 늘고 있다. AP통신은 멕시코 남부 타바스코주에 있는 한 이민자 쉼터엔 올 들어 벌써 1500명이 거쳐 갔다고 보도했다. 작년 1년간 이곳을 지나간 3000명의 절반이 6주 사이에 왔다고 전했다.
코로나19로 닫혔던 국경들이 조금씩 열리고 바이든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이민자들의 이동이 다시 시작된 것으로 분석된다.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시대의 반이민정책에는 반대하지만 불법 입국자에 대해선 단호히 대처하겠다는 입장이다.
워싱턴=주용석 특파원 hoho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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