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진영 논리에 빠지지 않는 소신 판결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 인사로 분류된다. 2005년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지명으로 대법원장에 올랐다. 상원의 인준청문회 때 민주당 44명 중 22명이 그의 보수 성향을 들어 인준에 반대했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조 바이든 대통령도 반대표를 던졌다.
실제 로버츠 대법원장은 보수적 판결을 내릴 때가 많았다. 하지만 늘 그런 건 아니었다. 오히려 진보와 보수가 팽팽히 맞선 민감한 사안에서 진보 쪽 손을 들어준 적도 꽤 있다. 지난해 6월 동성애, 이민, 낙태 관련 세 건의 판결이 대표적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6월 15일 성적(性的) 성향을 이유로 한 고용차별을 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동성애자 2명과 트랜스젠더 1명이 ‘성적 성향을 이유로 해고돼 차별을 당했다’며 낸 소송에서다.
당시 대법원은 총 9명의 대법관 중 보수 5 대 진보 4의 구도였다. 하지만 로버츠 대법원장과 주심을 맡은 닐 고시치 대법관이 진보 쪽 손을 들어주면서 6 대 3으로 판결이 났다. 둘 다 보수로 분류되는 인사였기 때문에 진보 쪽에서 놀랄 정도였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는 “차별 반대를 옹호하는 이들에게 놀라운 승리를 안겼다”고 평가했다.
사흘 뒤 불법체류 청소년 추방유예제도(DACA) 판결에서도 로버츠 대법원장은 진보 측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DACA 폐지 움직임에 제동을 건 판결이었다. 특히 이 판결은 로버츠 대법원장이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면서 5 대 4로 결론이 났다. 트럼프 대통령은 판결 직후 트윗을 통해 “대법원의 끔찍하고 정치적인 결정”이라고 비난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작년 6월 29일엔 낙태 수술을 할 수 있는 병원과 의료진 수를 제한한 루이지애나주의 법이 헌법에 보장된 여성의 낙태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했다. 낙태 옹호론자들이 루이지애나주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다. 이 판결 역시 8명의 대법관이 진보와 보수로 양분된 가운데 로버츠 대법원장이 진보 쪽 손을 들어주면서 5 대 4로 결정이 났다.
동성애, 이민, 낙태 등 미국에서 진보와 보수가 첨예하게 갈리는 쟁점에서 공화당 대통령이 임명한 보수 성향 대법원장이 진보적 판결을 내린 것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인준청문회 때 “판사는 심판과 같다”고 했고, 2018년 미네소타대 강연에선 “우리의 역할은 분명하다. 헌법과 미국의 법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 같은 소신을 실천에 옮긴 것으로 평가된다.
둘째, 사법부 독립을 위해 대통령에게도 할 말은 하는 모습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2018년 11월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공개 설전’을 벌였다. 트럼프가 자신의 이민정책에 반하는 판결을 내린 존 티거 샌프란시스코 연방지방법원 판사를 “오바마 판사”라고 비판했을 때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성명을 통해 “우리에겐 ‘오바마 판사’와 ‘트럼프 판사’, ‘부시 판사’나 ‘클린턴 판사’는 없다”며 “자신들 앞에 선 모든 이를 공평하게 대하는 데 최선을 다하는 헌신적 판사라는 비범한 집단만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독립적 사법부는 우리 모두가 감사해야 할 대상”이라고 했다. 대법원장이 대통령의 발언에 공개적으로 성명을 낸 것 자체가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판사 집단을 편가르기한 대통령의 발언으로 사법부의 독립성이 위협받자 과감히 목소리를 낸 것이다.
로버츠 대법원장 얘기를 꺼낸 건 한국에서 사법부 독립성이 의심받는 사태를 보면서다. 김명수 대법원장의 정치적 중립성 위반 논란과 거짓말이 한국에서 사법부 독립을 흔드는 계기가 됐다. 한국이나 미국 모두 대법원장의 영문 명칭은 ‘최고 정의(Chief Justice)’로 똑같은데 대법원장에 대한 두 나라의 평가는 너무나 달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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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부와 입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응답자가 공화당원이냐, 민주당원이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긴 하다. 이를 감안해 무당파만 따로 떼놓고 봐도 결과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무당파의 사법부 신뢰도는 63%로, 각각 37%와 29%에 그친 행정부와 입법부를 크게 앞섰다. 정치적 견해와 상관없이 상당수 미국인이 사법 시스템을 신뢰한다는 얘기다.
이번 조사는 지난해 8월 31일~9월 13일 18세 이상 미국인 1019명을 대상으로 이뤄졌으며 오차범위는 ±4%다. 신뢰도는 ‘아주 많이 신뢰한다’와 ‘꽤 신뢰한다’를 합친 숫자다.
갤럽은 1972년부터 매년 정부기관 신뢰도를 조사하고 있다. 갤럽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도는 지난 25년간 (행정부와 입법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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