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뇌마저 태운 '시간의 테두리'

입력 2021-03-01 16:51   수정 2021-03-02 00:11

좀 떨어져서 보면 가는 선으로 가득한 드로잉 같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니 갈색 선은 불이 만들어낸 그을음이다. 테두리가 그을린 얇은 한지들이 치밀하게 모여 영겁의 시간을 넘어온 암모나이트가 되기도 하고 명상 중 만날 수 있는 이상적인 공간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미국과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 중인 작가 김민정(59)의 개인전 ‘타임리스(Timeless)’가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한지를 소재로 한 ‘Timeless’ ‘Sculpture’ 등의 대표작과 신작 등 30여 점을 걸었다.

‘한지 향불’ 회화로 유명한 김민정의 작업은 구도(求道)와도 같다. 가늘게 잘라낸 한지의 가장자리에 촛불을 살짝 붙였다가 손으로 꼭꼭 눌러 끄면 그을음이 남는다. 작가는 그렇게 만들어낸 한지 조각을 일정한 간격으로 하나하나 붙인다. 숨 죽여 집중해야 하는 몰입의 과정. 불에 탄 한지 끝이 겹겹이 만나 잔잔한 물결을 만들고, 그 물결들은 다시 거대한 추상이 된다. 김민정은 “작업을 하다 보면 생각이 없어진다. 시간의 흐름도 마음속 번뇌도 잊는다”고 말했다.

광주의 인쇄소 집 딸로 태어난 김민정은 어릴 때부터 종이를 자르고 붙이며 놀았다. 홍익대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1991년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난 뒤 그간 당연시했던 한지와 먹, 붓에 더 집중하게 됐다. 먹과 수채 물감의 얼룩과 번짐을 극대화한 추상 작품을 발표했고, 2000년대 들어선 촛불과 향불을 이용해 한지를 태우는 작업을 본격화했다.

물감의 번짐을 이용한 ‘산(mountain)’ 연작도 내놓았다. 엷은 물감을 수십 번 중첩시켜 농담의 변화를 만들어냈다. 전통 산수화를 현대 추상화로 확장한 작품이다. 그는 “바다의 잔잔한 물결을 표현하려 한 것인데 사람들이 산처럼 보인다고 해서 제목을 ‘산’으로 바꿨다”며 “내 의도보다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이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몽환적으로 중첩된 봉우리에서 한국의 산들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난다. ‘산’ 연작은 영국박물관에도 소장돼 있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귀국했던 김민정은 무거운 한지 꾸러미와 함께 프랑스 남부 생폴드방스로 돌아갔다. 한지를 고르거나 살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는 “나에게 종이는 쓰는 게 아니라 섬김의 대상”이라며 “종이는 인간의 발명품 중 가장 약하면서도 몇천 년을 살아남은 질긴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전시는 이달 28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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