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욱의 논점과 관점] '가상의 친일파' 누가 만드나

입력 2021-03-09 17:06   수정 2021-03-10 09:05

요즘 들어 다소 뜸해진 감이 없지 않지만 끊임없이 한국 사회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존재가 있다. 이름하여 친일파. 토착왜구로 불리기도 한다. 광복된 지 76년이 지났건만 ‘일본제국’이라는 고리짝에 닳아 없어졌을 권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떵떵거린다는 집단이다. 다만 역사 속 과거형이 아닌, 현재형으로는 그 ‘실존’을 증명할 수 없기에 ‘유령’이라 부르는 게 적합해 보인다. 그저 ‘지금도 친일파가 창궐한다’는 목청 높은 일부의 눈에만 비칠 뿐이다.
노골적인 '친일 올가미'
경복궁을 가로막던 조선총독부도,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칼 찬 순사’도, 한국어 말살과 창씨개명의 강압도 모두 사라진 시대에 뜬금없이 ‘친일파’가 거듭해서 ‘소환’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 단서를 살펴볼 수 있는 일이 얼마 전 있었다. 지난달 22일 국회 산업재해 청문회에서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최정우 포스코 회장에게 ‘신사 참배’ 의혹을 제기한 것이다. 최 회장이 과거 일본 도쿄를 방문했을 때 도쿄타워 인근의 유명 사찰 ‘조조지(增上寺)’를 방문해 사진을 찍은 게 빌미 잡혔다.

산재 문제를 따지겠다며 기업인을 부른 자리에서 신사 참배를 거론한 것도 난데없지만, “사진을 보면 ‘절 사(寺)’ 자가 있다”는 당사자 해명에도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사당’을 계속 운운한 대목에선 눈 밖에 난 이에게 ‘친일 올가미’를 씌우려는 저의가 있다는 의심을 거두기 어렵다. 일본에서 1868년부터 신도(神道)와 불교가 분리됐다는 ‘팩트’와 사진에 선명하게 찍힌 ‘나무아미타불(南無阿?陀?)’이란 문구가 눈에 들어오지 않는 모습이다.

이처럼 사실관계를 무시한 채 ‘친일 낙인찍기’를 하는 장면은 낯설지 않다. 이수진 민주당 의원은 ‘친일파 파묘법’을 주장한다. 친여 성향 역사학자 전우용 씨는 야권이 제기한 ‘한·일 해저터널’ 구상에 대해 “대륙 진출을 열망하는 왜구를 돕는 일”이라고 못 박는다. 일본과 관련된 일, 일제시대를 산 사람의 복잡한 인생을 ‘친일’과 ‘반일’로 단박에 무 자르듯 구분하는 신공이 있는 모양이다. 하긴 “일본 유학을 갔으면 친일파”(소설가 조정래)라는 명쾌(?)한 기준이 제시되긴 했었다. 그런 추상 같은 척도로 공화당과 민정당, 한나라당을 거쳤던 김원웅 광복회장의 본모습도 밝혔으면 싶다.

복기해 보면 최근 몇 년간 일본에 빌붙어 온갖 이권을 누린다는 ‘공상 속 친일파’를 지속해서 창출한 것은 여권이었다. 민족·민주세력이 친일파와 독재권력, 재벌에 맞서고 있다는 가상현실을 국민에게 강요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친일파’는 선거용 정치공세, 자신의 치부를 가리는 방패막이 소재로 ‘전가의 보도’처럼 쓰였다.
백해무익한 선전 구호
때론 칼날이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는 모습이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북한의 김일성은 “조선의 종속자본가 계급은 일본 제국주의와 결탁해 인민을 착취하고 억압했다. … 이들은 일제가 패배하자 친미파로 재빠르게 변신해 일본 대신 미국에 보호를 구했다”(오구라 기조 《조선사상전사(朝鮮思想全史)》에서 재인용)고 목소리를 높였다. 당시 남한의 한민당을 견제하고자 친일·친미 적폐로 몬 발언이었다. 공산주의자가 현 민주당의 모태 격인 한민당을 공격하기 위해 꺼냈던 레토릭을 손자뻘인 현재 여당이 토씨 하나 바꾸지 않고 사용하는 모습을 어떻게 봐야 하나.

사실도 아니고, 사회에 아무 효용도 없는 ‘가상의 친일파’를 정치적 이득을 보려고 계속 만들어 내선 곤란하다. ‘유령’이 출몰하는 시대는 한참 전에 끝나지 않았나.

kimd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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