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백신을 선점해 자국민 우선 접종에 전력을 쏟고 있다. ‘제 코가 석 자’여서 이웃 나라의 낮은 백신 접종률은 안중에도 없다. 제 발등에 떨어진 불 끄기에 급급한 분위기다.
백신 확보전에서 밀린 개발도상국들은 중국과 러시아에 손을 내밀고 있다. 중국이 코로나19의 진원지라는 비난 여론이나 중국·러시아산 백신의 신뢰성이 떨어진다는 우려도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국의 적극적인 백신 외교와 미국의 소극적인 대처가 국제사회의 ‘맞수’인 양국의 위상에 중장기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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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보이콧 분위기를 가라앉히려는 것은 중국이 백신 외교를 통해 이루려는 여러 목표 중 하나에 불과한 것으로 전문가들은 판단하고 있다. 중국은 시노팜 시노백 등 자국 기업이 생산한 백신을 공급하는 조건으로 여러 국가와 접촉하며 긴밀한 관계를 쌓아가고 있다.
중국이 백신 외교로 포섭한 국가 중에는 미국의 우방국이 다수 포함돼 있다. 대표적인 지역이 중남미다. 미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멕시코만 해도 연초부터 미국에 백신 지원을 요청했다. 미국과 정상회담까지 했는데도 별 소득이 없자 안드레스 마누엘 로페스 오브라도르 대통령은 중국과 접촉했다. 이웃 국가의 백신 지원 요청을 거절한 미국과 달리 중국은 2200만 도스를 공급하겠다고 확답했다.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며 “중국 백신은 필요없다”던 브라질의 자이르 보우소나루대통령도 최근 태도를 바꿨다. 브라질에서 코로나19 환자가 급증하자 브라질은 중국 백신을 사고 싶다는 의향을 전달했다.
중국 백신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도 영향력을 키우고 있다. 중국은 미국과 긴밀하게 군사적 협력을 해오던 필리핀에 무상으로 코로나19 백신을 보냈다. 중국이 백신 공급계약을 한 국가는 50~60곳으로 알려졌다.
중앙아시아와 유럽에서도 사람들이 러시아 백신을 접종하고 있다. 키르기스스탄 연구소인 센트럴아시아바로미터의 설문조사를 보면 중앙아시아 국가 국민 대다수가 “코로나19 극복을 도울 수 있는 국가는 러시아”라고 여기고 있었다.
헝가리 등 동유럽 국가들이 스푸트니크V를 도입했고 이탈리아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최초로 자국에서 러시아 백신을 생산하기로 했다. 토마스 메르텐스 독일 상임예방접종위원장은 최근 인터뷰에서 스푸트니크V에 대해 “EU가 언젠가 승인할 수도 있는 좋은 백신”이라고 평가했다. EU도 나발니 구속과 관련해 러시아 관료들을 제재하는 등 양측 관계가 좋은 편은 아니다.
러시아는 스푸트니크V의 위상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화이자, 모더나 백신에 대한 흑색선전을 펼치기도 했다. 미 국무부는 러시아 정보기관들이 인터넷 매체를 활용해 화이자와 모더나 백신의 부작용을 과장하는 정보를 퍼뜨렸다고 파악했다.
미국은 자국민 우선 접종에 집중하느라 우방국에 백신을 지원하는 데는 소극적이었다. 국제 백신공급기구인 코백스퍼실리티에 자금을 대는 방식으로 다른 국가의 백신 확보를 지원하는 정도였다. 물론 자국의 코로나19 종식이 시급한 미국으로선 우방에 백신을 양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미국의 ‘공백’으로 국제사회에서 중국이 소프트파워를 강화하고 영향력을 확대한 것은 사실이다. 크리슈나 우다야쿠마르 듀크글로벌보건혁신센터 소장은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리더십을 보일 기회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오는 5월 1일부터 모든 미국 성인을 대상으로 백신 접종을 확대하겠다고 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여유가 생긴 상황이다. 미국은 중국의 백신 외교에 밀렸던 그간의 상황을 만회하기 위해 행동에 나설 가능성이 크다. 그 출발점은 일본 인도 호주 등 쿼드 국가들과의 협업이 될 전망이다. 일본 인도 호주 모두 중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나라들이다. 미국은 백신을 아시아 지역에 배포해 중국에 대응하는 방안을 이들 국가와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은 백신여권 문제도 빠르게 대응하고 있다. 백신여권이란 코로나19 백신 접종 여부를 증명하는 서류다. 중국은 지난 8일부터 백신여권을 내놨고 여러 국가와 상호 인증을 추진하고 있다.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은 스페인 등이 백신여권 도입을 추진하고 있다. 미국은 아직 검토 단계다. 세계보건기구(WHO)는 백신여권에 반대하고 있다. 아직 백신의 효능을 확신할 수 없고 백신 접근성이 나라마다 다른 상황에서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는 게 WHO의 의견이다.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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