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일본을 동일체로 보는 오류

입력 2021-03-22 17:50   수정 2021-03-23 00:39

기자가 자주 이용하는 미용실의 20대 후반 여성 미용사는 요즘 한국 드라마 보는 낙에 산다고 했다. ‘무리’ ‘구분’ 처럼 일본어와 발음이 같은 한국말이 의외로 많아서 신기하다고도 했다. 대학에서 국문과를 졸업한 기자가 “식민지 시대의 영향으로 한자어의 70% 이상이 같기 때문”이라고 아는 척을 했다. 이 미용사는 머뭇머뭇하더니 “근데 어디가 어디의 식민지였어요?”라고 되물었다. 일본의 젊은 세대가 근대사에 무지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후쿠시마와 한국은 같은 편"
2019년 6월 한·일 언론인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 일본 의회를 방문했을 때 지역구가 후쿠시마현인 야당의 한 의원이 한국 기자단을 반색하며 “보신전쟁과 식민지 시대를 겪은 우리는 같은 편”이라고 말했다. 1868년부터 1869년까지 이어진 보신전쟁은 조슈번(현 야마구치현)이 주도한 신정부군이 막부군의 주축세력이 버티던 아이즈번(현 후쿠시마현)을 가혹하게 토벌한 내전이다.

내전에서 이긴 야마구치현은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총리를 숱하게 배출하며 일본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했다. 2019년 총리였던 아베 신조도 야마구치현을 지역구로 뒀었다. 야마구치현에 당한 역사를 공유했으니 ‘우린 같은 편’이라는 게 이 의원의 설명이었다. 야마구치현과 후쿠시마현은 지금도 서로 혼인을 꺼릴 정도로 감정의 골이 깊다. 아베 총리가 후쿠시마 선거 유세 때 보신전쟁 당시 야마구치현의 가혹한 처사를 대신 사과한 적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한·일 관계가 최악이던 시기에 국회의원이 상대편 기자단을 ‘같은 편’이라며 반기는 건 의외였다. 100년 남짓한 기간 동안 군국주의와 패전, 미국 주도의 민주주의를 경험한 결과 일본은 사상적·사회적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평가를 받는다. 수백 년 동안 봉건 영주제를 유지했던 탓에 지역색도 강하다.
일본엔 우익만 있는 건 아니다
그런데도 한국은 일본을 ‘거대한 보수우익 세력이 주도하는 나라’로만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한·일 관계에 정통한 전문가들이 일본의 다양성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부족하다고 아쉬워하는 이유다. 일본을 한 덩어리로 취급하다 보니 어디가 어디의 식민지였는지도 모르는 세대, 한국은 우리 편이라는 지역까지 모조리 적으로 돌리는 전략적 실패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와타나베 마사타카 아사히신문 사장도 “일본 서점에 혐한 서적이 즐비하지만 연구 결과에 따르면 보수 우익 여론을 조장하는 ‘순수 우익’ 비율은 1% 정도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 출범에 맞춰 한국 정부는 일본과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 지난 1월 말에는 자타공인 ‘일본통’으로 불리는 강창일 전 의원을 주일 대사로 임명했다. 지난 10일 첫 특파원 간담회에서 강 대사는 우리 정부가 한·일 관계 개선 카드로 자신을 보냈다는 것을 숨기지 않았다.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던 강제징용 피해 및 위안부 문제에서도 변화가 감지된다. 일부 일본 언론은 한국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와 위안부 할머니들을 개별적으로 설득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일본 정부와 일본 전범기업에 배상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손해배상금은 한국 정부와 기업이 대신 내주는 해결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이 방안의 최대 어려움은 여전히 일본에 강경한 국내 여론을 설득하는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한국 정부와 강 대사가 일본의 다양성을 잘 설명해 우리 국민을 납득시켰으면 한다.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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