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살스러운 인물을 통해 일상의 빛나는 순간을 표현해 온 화가 최석운(61)이 자연을 들고 돌아왔다. 보는 이 없어도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인간을 품어주던 꽃과 나무, 새가 캔버스를 메웠다. 익살을 걷어낸 자리는 자연이 건네는 따스한 위로가 채웠다. 서울 신사동 갤러리나우에서 열고 있는 개인전 '낯선 자연, 낯선 위로'다.
최석운의 2020년 봄은 잔인했다. 지난해 3월, 4년만에 개인전을 열었지만 코로나19 직격탄을 맞았다. 쓸쓸하게 막을 내린 전시는 그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게 모두 헛되다는 허탈감이 들었어요. 작업실이 있는 해남 이마도에서 일주일동안 술만 마셨죠."
파가 그에게 온 건 그때였다. 느즈막히 술에서 깨 자전거를 타러 나온 길, 작업실 앞에 있던 파밭이 눈에 들어왔다. 해남에 작업실을 연 지 반년이 됐지만 한번도 인지하지 못했던 존재였다. 단단하게 뻗은 파는 싱싱한 에너지를 뿜어냈다. "핏줄이 생생하게 비칠 정도로 생명력이 대단했어요. 커다란 꽃까지 피어있었죠. 온 몸이 떨릴 정도로 흥분되고 에너지가 샘솟았습니다."
밤새 파의 생명력을 안으로 소화해내고 파밭을 다시 찾았다. 하지만 대파는 더이상 그자리에 없었다. 꽃이 핀 파는 상품성이 없어 버렸다는 설명이 돌아왔다. 밭에 남은 파를 수거해 늦여름까지 내내 그렸다. 그의 붓을 거치면서 파는 단단하게 대를 뻗은 나무가 됐다. 파꽃, 무꽃에 까치가 찾아들면서 '화조도' 연작이 됐다. "꽃과 새를 그린 화조도는 사대부를 위한 유희였죠. 저는 파꽃, 무꽃, 까치 등으로 대중을 위한 화조도를 그리고 싶었습니다."
파를 시작으로 주변의 자연이 하나 둘 눈에 들어왔다. "수십년 저희 집을 둘러싸고 있던 주목(朱木), 동백꽃 더미,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원시림 등을 이제야 알아채게 됐어요. 팬데믹을 겪고서야 자연의 소중함을 알게된 간사한 인간을 묵묵히 지켜주는 자연을 그리며 저 자신이 치유되는 기분이었죠."
최석운은 이번에 한지를 이용하는 실험도 선보였다. 해남에 머물며 접하게된 전주 한지에 아크릴로 작업했다. 물감을 띄워 빛을 반사하는 캔버스와 달리 색을 머금고 묵직한 힘을 전하는 한지는 자연을 한층 더 깊이있게 담아냈다.
"이제 60대 초입에 들어섰지만 새로운 도전에 전에 없는 에너지를 느낍니다. 제 몸이 가는대로 자유롭게 작품을 펼쳐볼 생각입니다." 전시는 30일까지.
조수영 기자 deline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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