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의 한 연구소를 방문해 주변 지역에 대한 소개를 받는데 ‘갑골(甲骨)’이라는 표현이 있었다. 궁금한 마음에, 갑골이 발견되는 곳은 은허(殷墟)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제대로 의사전달이 되지 않았다. 나중에 알아보니 갑골은 미국의 데이터베이스 소프트웨어 회사인 오라클(Oracle)의 베이징 지사가 있는 곳이었다. 그리스 신전에서 환각 상태로 점괘를 알려주던 점쟁이(오라클)와 거북 껍질이나 소뼈에 점괘를 적어 놓던 일이 서로 관련이 있어서 그리된 것이었다.
중국은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에는 한자(漢字) 한 글자를 대응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중국에서 명멸했던 국가들은 진, 한, 수, 당, 원, 명, 송, 청과 같이 모두 한 글자로 된 이름을 가지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도 없는 글자까지 만들어 가면서 중요한 개념에 한 글자씩 붙여준다. 중국의 화학원소 주기율표를 보면, 기체상태의 원소들은 수소(), 헬륨()처럼 기운을 뜻하는 기()를 부수로 하는 한자를 만들어서까지 한 글자 이름을 붙였다. 주기율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금속성 원소에는 라듐(), 우라늄()처럼 쇠금 변의 글자를 만들어 붙였다.
그렇지만 이렇게 중요한 것이 새로 나올 때마다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일본은 한자의 종주국이 아니어서 한자를 만들어내기보다 이미 있는 한자를 조합해 새로운 개념을 표현해 왔기에, 두 글자짜리 한자어를 많이 생성해냈다. 주기율표에 나와 있는 수소, 산소, 탄소, 질소, 염소 등이 그렇고, 양자물리학의 양자(量子)도 그렇다. 일본 학자들은 서구 문명을 따라잡는 과정에서, 동양의 한자 문화권에 없는 개념을 표현하기 위해 동양의 고전(古典)과 서양어의 어원과 역사를 따져가며 새로운 한자 복합어들을 만들었다. 이렇게 생겨난 수많은 한자어는 우리나라와 한자의 종주국인 중국의 학자들도 받아들여 쓸 수밖에 없었다.
한·중·일 세 나라의 과학기술용어는 여전히 일본학자들의 번역어에 크게 의존하고 있어서 공통된 것이 많지만, 조금씩 다르게 쓰는 것도 있다. 원자핵 안에 있는 양성자(陽性子)를 일본에서는 양자(陽子)라고 하여, 일본 서적을 많이 본 사람은 양자물리학의 양자(量子)와 양성자를 뜻하는 일본용어를 혼동하기도 한다. 라디에이션(radiation)은 우리나라와 일본에서 방사(放射)와 복사(輻射) 두 가지를 써 왔지만, 최근 일본에서는 복사라는 표현을 포기했다. 한 점에서 뻗어나가는 모양을 묘사하는 수레바퀴살 복(輻)자는 복사라는 용어 이외에는 거의 쓸 일이 없는 글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일본은 영어로 시작된 용어를 한자어로 번역하지 않고 일본글자 가타카나로 표현하는 데 익숙해졌고, 중국에서는 외국에서 만들어진 용어를 한자로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우리 한글은 표음문자라서 일본이나 중국에 비해 용어 사용에 훨씬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쓰이고 있는 한자어에는 동음이의어가 많아서 한글로만 표기하는 데 따른 불리함도 있다.
김재완 < 고등과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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