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00%'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하는 세계 경제전망에는 전세계 각국의 경제지표 전망치가 제시된다. 경제성장률, 물가상승률 등이다. 국가별 경제 상황은 모두 제각각이지만 백분율로 제시되는 전망치는 대동소이하다. 경제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대체로 한자릿수로 나타난다. 많아봐야 10% 이내에서 경제가 변동한다. 국가별 격차도 10%포인트를 넘기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나라의 올해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5500%였다. 올해 경기 회복과 함께 많은 나라들의 물가상승률이 작년 대비 높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모든 나라의 물가상승률을 산술적으로 더해도 이 나라의 물가상승률에 미치지 못한다. 경제성장률도 눈에 띈다. 이 나라의 경제성장률은 지난해 -30%였다. 올해는 작년에 비해 상당히 개선돼 -10%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올해 국내총생산(GDP) 대비 일반정부 채무비율은 304.1%였다. 지난해 232.8%에 비해 증가했다. 2017년 26.0%에 비해서는 10배 이상 뛰었다.
이 나라는 남미의 자원부국이자 반시장적 포퓰리즘 정책으로 일관해 국가의 존망이 위협받고 있는 베네수엘라다.
몇년 전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베네수엘라의 경제지표들은 더 처참했다. IMF가 지난해 10월 발표한 세계경제전망에 제시된 베네수엘라의 2019년 경제성장률은 -35%, 물가상승률은 1만9906%였다. 2018년에는 물가상승률이 1000만%에 이를 것이란 전망도 있었고, 결국 6만5374%로 선방했다. 비현실적인 수치로 보였던 올해 성장률과 물가상승률 전망치는 그나마 개선된 지표인 것이다.
베네수엘라가 이렇게 된 것은 20년 넘게 국가를 지배하고 있는 차베스-마두로 사회주의 정부의 복지 포퓰리즘 때문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2019년 당시 자유한국당이 발간한 '베네수엘라 리포트'는 원유 매장량 기준 세계 1위였던 베네수엘라의 경제가 빠르게 쪼그라든 이유로 무상복지를 꼽았다. 석유 생산과 판매로 얻은 수입을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는 데 쓰지 않고 포퓰리즘 정책에 투입하면서 국민의 자립 의지를 꺾었다는 것이다. 기업을 국영화해 시장 생태계를 망쳤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됐다.
이렇게 경제가 침체하는 상황에서도 베네수엘라 정부의 현금 복지는 계속됐다. 돈을 주기 위해 베네수엘라 정부는 화폐 발행을 늘리는 선택을 했다.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처럼 화폐가치가 폭락했고, 초인플레이션이 나타났다.
국가간 경제 격차가 큰 것이 명확한 사실이지만 한국에도 베네수엘라가 소환됐다. 문재인 정부의 각종 반시장적 정책이 베네수엘라와 닮았다는 이유에서다. 노인일자리 등에 재정을 투입하고 전국민 지원금 등 현금성 포퓰리즘에 나서는 점이 문제로 지적됐다.
지난해 부동산 시장을 잡겠다며 내놓은 각종 정책들은 '대네수엘라(베네수엘라+대한민국)'라는 유행어까지 탄생시켰다. 계약갱신청구권제, 전월세 상한제, 분양권 상한제, 토지거래허가제 확대, 부동산감독기구 설치 등 각종 규제가 베네수엘라와 닮았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우고 차베스 대통령이 이끌던 베네수엘라 정부는 2003년부터 9년간 임대료를 동결하는 조치를 단행했다. 이후에도 임대감사국(정부)이 면적에 따른 주택 임대료를 정해줬다. 전·월세상한제, 표준임대료와 비슷한 정책이다.
베네수엘라 정부는 2011년엔 임차인이 새로운 주택을 구하기 전 퇴거를 강제하지 못하게 하는 임의적퇴거금지법을 도입했다. 전세가격 폭등을 일으킨 주범으로 지목되는 계약갱신청구권제와 비슷하다. 부동산감독기구는 베네수엘라의 공정가격감독원을 연상시킨다.
베네수엘라 식의 무차별 시장개입을 하는 것이냐는 지적이 일자 정부는 '부동산감독기구'가 아니라 거래를 분석하고 모니터링하는 기관을 설치하겠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최근 LH 직원들의 투기 사태 이후 다시 부동산거래분석원을 부동산감독기구로 활용하는 것으로 입장을 바꿨다. 베네수엘라식 시장 통제의 우려가 다시금 제기되는 이유다.
한 시장 전문가는 "사람들이 한국을 '대네수엘라'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 경제가 베네수엘라 수준으로 처참하게 망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베네수엘라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그런 방향으로 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맞다"며 "과도한 비난이라고 일축하고 정책을 밀어붙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
강진규 기자 jos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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