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유통 빅뱅…깨진 공식들

입력 2021-04-07 17:44   수정 2021-04-08 00:26

지난 3월 서울 여의도에선 주말마다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직장인들이 출근하지 않아 주말엔 한산한 여의도 진입로가 난데없이 꽉 막혔다. 때 이른 “벚꽃 축제 기간으로 착각했다”는 이들도 있었다. 2월 26일 문을 연 서울 최대 규모 백화점 ‘더현대서울’이 주말 교통 체증의 원인이었다.

더현대서울은 팬데믹(대유행) 이후 오프라인 유통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란 전망을 뒤집었다. 코로나19 속에서 예상 밖의 흥행을 거뒀다. 오랜 유통 공식도 깨졌다. 3대 명품인 ‘에·루·샤(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가 없으면 흥행이 어렵다는 공식, ‘백화점은 창문을 두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깼다. 더현대서울은 유리천장이다. 인공폭포, 녹색공원을 실내로 들였다. 틀을 깬 공간에 MZ세대(밀레니얼+Z세대)가 열광했다. 더현대서울을 해시태그한 인스타그램 게시물은 7일 오전 기준 7만3600개에 달한다.

전통 유통 공식의 또 다른 파괴자는 쿠팡이다. ‘유통=내수산업’이란 공식이다. 지난달 11일 미국 뉴욕증권거래소엔 쿠팡을 상징하는 대형 로켓이 그려진 현수막과 태극기가 걸렸다. 쿠팡 상장은 2014년 중국 알리바바 이후 최대 규모 기업공개(IPO)로 기록됐다. 미국 CNBC는 “괴물 IPO”라고 보도했다. 쿠팡의 시가총액은 한때 100조원을 넘어섰다. 국내 ‘유통 빅3’ 신세계·이마트와 롯데쇼핑, 현대백화점그룹의 시총 합산액(약 13조5000억원)의 일곱 배가 넘는 규모다.

쿠팡은 국내 유통시장에서 배송 전쟁을 촉발한 ‘이단아’였다. 대규모 물류 투자로 물건을 팔면 팔수록 손실이 커져 2018년엔 연간 적자가 1조원을 넘어섰다. 기존 유통업체들은 “사업모델이 아니다” “자금난으로 곧 쓰러진다” 등 혹평을 쏟아냈다. 지난해 말까지 쿠팡의 누적 적자는 4조7500억원. 하지만 코로나19가 덮친 지난해부터 쿠팡의 매출이 폭발했다. 뉴욕증시 상장 성공으로 김범석 쿠팡 대표는 시장의 의구심을 떨쳐냈다.

유통업체들이 쿠팡만 쳐다보는 사이에 또 다른 이단아가 소리 없이 등장했다. 지난해 초부터 유통시장을 흔들고 있는 네이버다. “쿠팡만 쳐다보다 당했다”는 말이 업계에서 나왔다. 네이버는 ‘네이버=검색기업’이란 공식에서 벗어나 국내 e커머스기업 1위에 올랐다. e커머스 사업을 본격화한 지 6년 만이다. 지난해 거래액은 27조원. 쿠팡(약 22조원), 이베이코리아(약 20조원)보다 많다. 이윤숙 네이버쇼핑 대표는 “단 한 번도 유통업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 성장 비결”이라고 말한다.

최근 쿠팡의 생존에 물음표를 달았던 전통 유통업체의 반격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신세계는 네이버와 손잡았다. 롯데는 중고나라를 인수했다. 두 기업은 이베이코리아 인수전에서도 맞붙는다. 그야말로 ‘빅뱅’이다. 최근 만난 한 기업인은 “코로나19로 10년간 일어날 변화가 1년 만에 압축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했다. 한 유통업계 관계자는 “뭐라도 하지 않으면 영원히 도태될 것만 같은 불안감이 팽배하다”며 현장에서 느끼는 위기감을 전했다.

과학사의 획기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연구한 미국 과학철학자 토머스 쿤은 이렇게 말했다. “미래는 과거에서 온다. 그러나 직선으로 오지 않는다.” 그는 모든 길의 커브를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했다. 한국 유통산업은 지금 급커브를 돌고 있다.

slj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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