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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어느 겨울날 새벽, 설악산 토왕성 폭포 빙벽을 오르며 다음날 새벽까지 사진을 찍었다. 정상에 오르니 한 발자국도 더 움직이기 어려웠다. “이곳에 뼈를 묻게 될 것 같다”며 울었다. 동료의 도움으로 겨우 하산한 뒤 쓰러져 사흘을 잤다. 그리고 다시 산으로 달려갔다. 한국 최초의 여성 클라이밍 사진작가 강레아 씨(53·사진)가 들려준 얘기다.
강 작가는 서울 인사동 갤러리 밈에서 다음달 2일까지 ‘소나무-바위에 깃들다’ 전시를 연다. 북한산 바로 옆 쌍문동 자택에서 지난 5일 그를 만났다. 강 작가는 이곳에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산의 모습을 감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쓴다. 등반 사진가로서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상황이 허락하는 날은 산행 및 암벽등반 훈련을 한다. 이따금 촬영을 다녀오고 사진이 쌓이면 전시를 연다. 그렇게 이번 전시회를 포함해 일곱 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산과 사진을 탐구하는 구도자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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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등산을 시작한 건 열아홉 살 때였어요. 가야산에서 일출을 봤는데 하늘 빛깔이 너무 예뻐 사진에 담고 싶었습니다. 내려오자마자 카메라를 사서 산에 오를 때마다 들고 다녔지요. 대학 졸업과 취업, 사업 등 인생의 변곡점을 거치는 동안에도 산에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열망은 계속 강해졌어요. 결국 사진을 제대로 배우러 서른 살에 사진과에 들어가 2000년 졸업했습니다. 이후 2004년부터 산 관련 잡지 몇 군데에서 프리랜서로 일할 기회를 잡으면서 본격적으로 등반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됐습니다.”
구도의 길에는 고통이 따른다. 등반 중인 사람의 얼굴을 찍으려면 암벽에 매달린 채 상체를 밑으로 향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한 손만 써야 할 때가 많다. 무거운 사진기를 한 팔로 계속 지탱하다 보니 팔꿈치 바깥쪽 인대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3년을 버티다 결국 숟가락조차 들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수술을 했다.
“재활하는 데 1년 정도 걸렸어요. 하지만 몸의 아픔보다는 산에 올라가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고통이 더 컸습니다. 우울증까지 앓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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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 주제는 암벽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다. 강 작가는 소나무를 말할 때 존칭을 썼다. “그분들은 연약하면서도 고난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존재입니다. 가늘고 연한 나무 뿌리가 바위를 파고들어갈 수 있는 건 살아남으려는 의지가 그만큼 강하기 때문이죠. 인고의 세월을 이겨낸 소나무의 모습에서는 고귀한 아우라, 즉 모방할 수 없는 특유의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강 작가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나무의 모습은 첫 등반에서 마주친 ‘인수봉 오아시스 소나무’다. 오아시스는 등반 도중에 사람이 쉴 수 있는 장소다. 이곳에서 수령 100년이 넘는 노송이 흙도 거의 없는 바위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많은 초보 클라이머가 그 뿌리에 체중을 지탱했지만 소나무는 이를 묵묵히 감내했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성인의 모습이 저절로 연상됐다.
강 작가는 이런 아우라를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사진을 흑백으로만 찍는다. 화려한 색채는 감각을 어지럽힌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국의 산은 흑백으로 표현해야 본연의 매력이 살아난다는 이유도 있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가 좋은 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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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봉 오아시스의 그분은 2019년 태풍 링링에 쓰러졌어요. 하지만 그분의 아우라가 준 감동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을 겁니다. 코로나19 사태를 맞은 인간의 상황도 암벽 위 소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삶의 의지를 굳게 다지고 전보다 강한 존재로 거듭나야 합니다. 대신 이 고비를 넘기면 전과 다른 경지에 올라설 수 있겠죠. 코로나19로 고통받는 분들이 고통을 이겨낸 소나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고 용기를 얻었으면 합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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