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무지와 위선에 홀리면 王도 바보가 된다

입력 2021-04-16 17:50   수정 2021-04-17 00:12


이탈리아 피렌체에 갈 때마다 우피치 미술관에 들렀다. 그중에서도 산드로 보티첼리(1445~1510)의 전시실을 자주 찾았다. 고풍스러운 건물의 3층 중간에 있는 보티첼리 전시실에는 늘 관람객이 넘쳤다. 그 유명한 ‘비너스의 탄생’을 보기 위해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까치발을 딛고 어깨너머로 겨우 감상해야 했다. 그다음 몇 차례 방문 때도 그랬다.

그러다 늦게 발견한 그림이 ‘아펠레스의 중상모략’이었다. ‘비너스의 탄생’에 비하면 3분의 1 크기밖에 안 되는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남긴 최후의 걸작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얘기가 함께 담겨 있다. 이야기 속에 또 하나의 이야기가 들어 있는 액자소설을 닮았다.

제목에 등장하는 아펠레스의 사연부터 보자. 기원전 4세기 사람인 아펠레스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총애를 받는 궁정화가였다. 대왕 곁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며 두터운 신임을 얻게 되자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대왕의 사촌이자 부하 장군인 프톨레마이오스는 그를 매우 싫어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타계한 뒤 프톨레마이오스가 이집트 왕이 되자 둘의 관계는 더욱 나빠졌다.
역모 혐의로 법정 끌려갔던 사연
그러던 중 아펠레스의 경쟁자인 한 화가가 “아펠레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을 살해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며 그를 모함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쓴 그는 역모 혐의로 법정에 끌려가게 됐다. 다행히 결정적인 증인이 “아펠레스는 결백하다”고 거듭 강조했고, 그를 모함한 경쟁자는 무고 혐의로 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한 폭의 그림으로 표현했다. 이후 그 그림은 유실됐지만, 기원전 2세기 시인 루키아노스의 책에 내용이 상세하게 묘사돼 전해져 온다. 그 기록에 따르면 그림 속에는 10명의 인물이 나온다.

화면 오른쪽에는 당나귀 귀를 가진 미다스 왕이 앉아 있다. 무언가에 짓눌린 듯한 표정으로 권좌에 앉아 있는 왕의 양쪽 옆에는 두 여인이 바짝 달라붙어 있다.

이들은 왕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감언이설을 끊임없이 귓속말로 속삭이는 ‘무지’와 ‘의심’의 상징이다.

그런 왕 앞으로 왼손에 횃불을 든 여인이 젊은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끌고 다가간다. 환한 대낮인데도 횃불을 치켜든 이 여인은 ‘중상모략’을 의미한다. 그녀의 곁에서 머리를 손질해주는 두 여인은 각각 ‘사기’와 ‘음모’다. 그녀의 팔목을 잡고 왕 앞으로 손을 뻗어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는 남자는 ‘질투’의 화신이다.

바닥에 쓰러진 채 힘없이 끌려가며 기도하는 젊은 남자는 ‘정직’을 뜻한다. 머리카락을 휘어 잡힌 채 꼼짝도 못 하는 그는 옷마저 벗은 무방비 상태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것뿐이다.

화면 왼쪽에 두 사람이 더 보인다. 한 사람은 알몸의 젊은 여인이다. 그녀는 오른쪽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그녀의 이름은 ‘진실’이다. ‘정직’처럼 숨길 게 없기 때문에 그 역시 벌거벗은 모습이다.

그런 ‘진실’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살짝 쳐다보는 검은 옷의 노파는 ‘후회’다. 억울한 법정의 불합리한 광경을 지켜보다가 양심의 가책을 느낀 노파의 표정에는 고통이 스며 있다.

숱한 인간 군상의 명암을 한눈에 보여주는 이 그림은 1700여 년 뒤에 일어난 보티첼리의 누명 사건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르네상스 시대 거장인 그도 여러 차례 중상모략을 당했다. 동성애 의혹으로 조리돌림을 당하거나 격변기 정치 상황에 휘둘려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그때 자신의 누명을 벗겨줄 구원자로 그가 택한 것이 아펠레스였다. 그는 루키아노스가 남긴 책의 묘사를 면밀하게 검토한 뒤 이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자신의 결백을 예술작품으로 대변했다.
21세기 우리 사회에 던지는 경고
이 그림의 배경은 고전 양식의 엄정한 국가 법정이다. 법정 기둥의 벽에는 실물 크기의 대리석 인물상들이 서 있고, 그 사이에도 화려한 조각이 장식돼 있다. 이 웅장한 르네상스 건축물 안에서는 지혜와 정의의 판결이 내려질 것만 같다. 그러나 현실은 이와 달라서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폭력이 난무한다. 아펠레스 시대인 2300여 년 전이나 보티첼리가 산 15세기나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아펠레스의 중상모략’은 역사를 먼저 체험한 선각자들이 21세기 우리 사회에 던지는 또 다른 경고일지도 모른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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