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보아오 포럼’을 국제 전략 선전장으로 활용해 왔다. 이번 포럼의 부제가 ‘글로벌 거버넌스’와 ‘일대일로(一帶一路) 협력 강화’인 것만 봐도 중국 의도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일대일로’는 시진핑 주석이 내세운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 재편을 뜻한다. 그런 행사에 문 대통령은 “구동존이는 포용과 상생의 길이며 코로나 극복에도 중요한 가치”라고 거들었다. 시 주석이 미국을 겨냥해 ‘남의 나라 가치에 대해 간섭하지 말라’는 의미로 써온 말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문 대통령이 강조한 ‘포용적 다자주의’도 마찬가지다. 이런 표현들을 인용한 것 자체가 국제사회에는 한국이 중국에 경사(傾斜)됐다는 메시지로 읽힐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이 ‘아시아 신기술과 혁신 거버넌스 협력’을 언급한 것도 그렇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작심하고 중국의 신기술 견제에 나선 마당에, 중국을 협력상대로 여긴다고 해석될 여지가 있는 대목이다. 문 대통령이 “백신 선진국들이 수출을 통제하려는 이기주의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 것도 미국을 향한 중국 주장과 맞닿아 있다.
바이든 행정부 출범 이후 우리의 외교일정이 매번 동맹국 미국보다 중국이 먼저였다는 점도 따져볼 일이다. 문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에 앞서 시 주석과 통화하면서 “중국 영향력이 날로 강해지고 있다”고 추켜세웠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취임 후 첫 일정으로 눈앞에 미·중이 대치하는 중국 샤먼으로 달려가 중국 외교장관에게 시 주석 방한을 거듭 요청했다. 4년간 대중 외교에 치중한 결과는 한한령 고수, 서해공정, 한국 방공식별구역(KADIZ) 침범 등이다. 그런데도 영상외교마저 미국보다 중국이 먼저다. 어느 쪽이 함께 피 흘린 동맹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한국 외교는 지금 미국의 반도체 공급망 재편과 코로나 백신 확보로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다. 경제 사활이 걸린 위기로, 모두 미국의 협조가 필수다. 바이든 대통령이 12일 삼성전자 등에 반도체 대미투자를 촉구한 것은 미·중 사이의 줄타기 외교가 아니라 양자택일을 하라는 분명한 메시지다. 백신 확보도 미국의 ‘배려’ 없이는 공백 사태가 불가피하다. 한 달 뒤 한·미 정상회담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이유다.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중국을 편드는 듯한 발언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외교는 냉엄한 현실이다. 지금 다급한 것은 친중적인 ‘전략적 모호성’이 아니라 반도체·백신 협조를 위한 한·미 동맹 복원이다. 모든 외교 역량을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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