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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고 고구려 영토를 질주하면서 고구려인이 돼가던 나는 요동으로 건너가 안시성을 찾았다. 산 위로 올라가 점장대 자리에서 성안의 골짜기와 멀리 산들을 바라보던 중 두 단어가 떠올랐다. ‘기적’ 그리고 ‘자유의지(free will)’였다. 둘레 4㎞에 불과한 이 산성에서 당 태종이 지휘하는 최강의 10여만 대군을 패퇴시켰다니…. 고립무원의 상황 속에서 패배할 확률이 절대적으로 높은 싸움인데도 항복을 거부한 그들, 90일간 극도의 공포를 이겨내고 격렬하게 전투를 벌인 고구려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지닌 힘의 정체는 무엇일까.
서쪽에서는 비잔틴제국까지 이어진 무역망을 확보할 목적으로 고창국(신강성의 투루판 지역)을 멸망시켰다(640년).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 사마르칸트시)은 627년부터 조공사절을 보냈고, 바르후만왕은 ‘강거도독’이 됐다. 석국(타슈켄트) 안국(부하라) 등 소국들도 당의 영향권으로 끌어들였다. 또 중간지역인 요서지역의 거란과 해(奚)를 복속시켜 고구려를 압박하게 했다. 놀랍게도 사할린의 ‘유귀’ 왕자가 세 번의 통역을 거쳐 당나라에 도착해 벼슬을 받았으며, 캄차카반도에 거주한 ‘야차’도 사신을 파견했다. 이처럼 유라시아 동쪽의 모든 나라와 종족들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당나라 편에서 전쟁에 참여하게 됐다. 어쩌면 이렇게도 후진타오의 ‘역사공정’,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과 비슷한지 모르겠다.
백제는 고구려와 화해를 시사하면서도 전쟁 발발 전까지 당나라에 사신을 무려 열일곱 번 보냈다. 신라도 당나라에 사신은 물론 유학생과 승려들을 자주 보냈고, 643년에는 군사 파견까지 요청했다. 하지만 백제는 번국(藩國, 제후의 나라), 신라는 번신(藩臣, 왕실을 지키는 중신)일 뿐이었다. 당나라는 결국 신라를 고구려의 대항세력으로 선택했고, 전쟁이 벌어지자 신라는 3만 명을 파견해 고구려를 남쪽에서 협공했다.
당나라는 선공을 하면서 해륙 양면작전을 개시했다. 645년 4월 육군은 요하를 건너 개모성(선양 외곽), 신성(무순 시내) 등을 점령하고, 별렀던 요동성을 공격했다. 수양제를 굴복시켰던 요동성은 주몽사당에 승리를 빌면서 치열하게 항전했지만 바람을 이용한 화공에 버티지 못하고 15일 만에 함락됐다. 병사 중 1만 명이 전사하고 1만 명이 포로가 됐으며, 백성 4만 명이 당나라에 끌려갔고 양곡 50만 석을 탈취당했다. 이어 당 태종은 남쪽으로 이동해 백암성에서 항복을 받았고, 안시성을 공격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와 말갈 혼성군인 15만 명을 파견했으나 주필산 전투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투에서 3만6800명이 포로로 잡히고 말갈병 3300명은 생매장당했다. 당나라는 말 5만 필, 소 5만 마리, 금빛 나는 갑옷인 명광개(明光鎧) 1만 벌을 노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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