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강국.’ 한국 반도체산업에 대한 정치권의 단골 수식어다. 사실일까. 반도체 전문가들에게 “한국이 정말 반도체 강국이냐”고 물으면 “절반만 맞다”고 답한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가 글로벌 메모리반도체 시장에서 확고한 ‘원투펀치’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전체 반도체시장 매출에서 메모리 반도체 비중은 30% 남짓이다. 나머지 70%를 차지하는 시스템 반도체 시장에서 한국 기업은 후발주자다. ‘메모리 1위’ 타이틀에 취해 기업 지원에 적극 나서지 않으면 한국 반도체산업이 무너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 반도체 기업들에 지난해는 실적 반등의 좋은 기회였다. 2019년 순이익이 전년 대비 32.1% 곤두박질친 영향으로 기저효과를 충분히 누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됐다. 그럼에도 실적 증가율이 경쟁국 기업보다 저조한 건 메모리 반도체에 대한 높은 의존도 영향으로 분석된다.
2018년 고점을 찍었던 D램 고정거래가는 2019년 61.2% 급락했다. 한국 반도체 기업 총이익이 그해 32.1% 급감한 이유다. 2020년엔 D램 가격이 1.4% 오르는 데 그쳤다. 삼성전자 등이 수율 향상과 기술력 향상에 나서도 가격 변동에 손쓸 방법이 많지 않다.
시장 상황에 따라 감산 또는 증산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이마저도 조심스럽다. 시장 참가자가 3~5개사 정도로 줄어든 상황에서 가격에 영향을 줄 수밖에 없고 이는 ‘담합’으로 비쳐질 수 있다. 실적 변동성은 기업이 가장 두려워하는 ‘리스크(위험) 요인’으로 꼽힌다. 미래에 대한 예측 가능성이 떨어져 미래 투자 재원을 마련하는 데 상당한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어서다.
부정적인 효과는 이미 나오고 있다. 한국 기업들의 2020년 연구개발(R&D) 지출은 2019년(9.4%)보다 2.5%포인트 낮은 6.9%를 기록했다. 경쟁국인 대만의 R&D 투자 증가율(2019년 13.3%, 2020년 18.2%)의 절반 수준이다. R&D 지출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지난해 한국은 8.7%로 대만(9.0%), 미국(16.4%)에 못 미친다.
천문학적 금액이 투입되는 시설 투자에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특히 삼성전자의 고민이 큰 것으로 알려졌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D램 사업의 변동성이 커 삼성전자가 한 해 D램에서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해서 파운드리에 대규모 자금을 투입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도 시스템 반도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2019년 시스템 반도체 육성 전략에 시동을 걸었다.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는 게 학계와 산업계의 냉정한 평가다. 진입장벽이 높고 기술 축적이 필요한 반도체산업 특성을 감안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업계에선 지원 규모가 턱없이 작고 체계적인 전략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한 국내 팹리스 관계자는 “매출 1조원 이상인 국내 팹리스가 실리콘웍스 한 곳뿐인 게 한국 시스템 반도체의 안타까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시스템 반도체의 경쟁력은 대만과 비교해도 크게 뒤처진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대만엔 세계 1위 파운드리업체 TSMC가 버티고 있고 연관 사업인 팹리스에선 스마트폰 AP 세계 1위(판매량 기준) 미디어텍과 디스플레이칩 전문 노바텍 등이 있다. 패키징(후공정)에선 ASE가 세계 1위고 파이슨 같은 컨트롤러 전문 업체의 경쟁력도 상당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은 파운드리에서 삼성전자가 세계 2위에 올라 있지만 TSMC와는 쉽지 않은 경쟁을 벌이고 있다. TSMC는 매년 30조원 이상 투자에 나서고 있는데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투자는 연 10조원 안팎 수준으로 알려졌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시설투자에 대한 공제율을 적어도 미국(40%) 수준까지 올려 투자에 대한 인센티브를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TSMC 중심으로 전후방 연관산업이 유기적으로 돌아가는 대만처럼 한국도 삼성전자 같은 대기업 중심의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재근 한양대 융합전자공학부 교수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팹리스, 패키징 업체를 키우고 협업할 수 있도록 산업 규제 법안을 재검토하고 세제 혜택을 늘릴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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