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단체 하마스의 무력 충돌이 잠정 휴전 상태로 일단락됐다. 양측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이집트가 중재자 역할을 톡톡히 한 가운데, 지난해 아브라함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었던 아랍에미리트(UAE)도 이-팔 평화 복구를 위한 중재에 나서겠다고 자처했다.
이집트·UAE, 양측 중재 자처
23일(현지시간) 영국 일간지 가디언 등에 따르면 UAE 실세인 모하메드 빈 자예드 왕세자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과 하마스 양측의 휴전을 강화하고 긴장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이집트의 중재 노력에 동참하겠다"고 밝혔다. 양측의 충돌은 지난 10일 이스라엘 당국이 동예루살렘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에 병력을 투입해 반(反)이스라엘 시위대를 강경 진압한 데서 비롯됐다.이후 약 11일 동안 양측 간에 로켓포 4000여발이 발사되면서 총 261명이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 민간인이 149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21일 오전 2시를 기해 휴전 상태에 들어갔으나, 가자지구 등지에서는 여전히 크고 작은 충돌이 잇따르는 위기 상황인 것으로 알려졌다.
UAE는 지난해 9월 이스라엘과 수교했다. 당시 도날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중재 하에 UAE, 바레인 등 걸프만 국가와 이스라엘 양측이 아브라함 평화협정을 맺은 것이다. 당시 협정의 지지자들은 UAE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약속한 '중동의 포괄적 평화'가 등장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 UAE의 외교적 노력으로 수단, 모로코 등이 이스라엘과의 화해 행렬에 동참했다. UAE 측은 이번 이-팔 갈등에 대해서도 "아브라함 평화협정을 토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중재를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란 견제' 우선에 외면했던 이-팔 갈등, 결국 폭발
그러나 워싱턴포스트(WP)는 최근 "결국 또 다시 폭발하고 만 이-팔 갈등이 아브라함 협정을 맺은 아랍국가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인내력을 시험하는 장이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가디언 등도 "터키와 이란 등은 반(反)이스라엘 연대에 앞장 선 반면, 아브라함 협정으로 이스라엘과 관계를 복원한 국가들(UAE, 바레인, 수단, 모로코)은 공식적 비판을 자제하면서 아랍국가들 간에 분열된 모습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이란은 이번 갈등을 촉발시킨 팔레스타인 하마스 등을 군사적으로 지원해왔다. WP는 "아브라함 협정은 오래된 이슈인 팔레스타인의 투쟁에 대한 중동의 정치적 피로감, 이란 정권이나 무슬림형제단과 같은 극단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들에 대해 더 우려하는 일부 아랍국가들의 정치엘리트들의 입장 등이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했다. 미국과 이스라엘, 수니파 이슬람국가들이 상호간 경제교역을 확대하고, 핵무기 개발 문제 등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영향력 확대를 저지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문제는 외면한 채' 전략적 화해에 나섰다는 설명이다.
알자지라 등 현지 언론은 이번 이-팔 갈등에 대해 "완전히 실패한 아브라함 협정"이란 보도를 내보냈다. 로이터통신도 "이스라엘이 걸프국 친구를 계속 사귈 수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가자지구가 이스라엘 로켓포로 무너지는 참상이 목격된 이상 이스라엘의 최고 외교목표인 사우디아라비아와의 화해는 더욱 어려워질 것으로 보인다"고 꼬집었다.
영국 싱크탱크 채텀하우스의 닐 퀼리엄 수석연구원은 "사우디 정부가 이스라엘과의 관계정상화를 고려하는 일은 이제 최소 몇년간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고 강조했다. BBC는 "미국으로부터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에 동참하라는 압박에 시달렸던 사우디로서는 이번 이-팔 갈등으로 한숨 돌리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어 "아무리 수니파 아랍국가들이 이란의 지원을 받는 하마스를 증오한다고 하더라도, 이번 사건으로 인해 수십년 반목 끝에 평화협정을 맺은 이스라엘과의 새로운 우정을 받아들이는 데에 더 큰 회의감을 느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여론 의식하는 아랍국가들, 빠른 중재가 해답
아브라함 협정을 이끌어낸 트럼프 전 대통령은 물러났다. 올해 초 취임한 조 바이든 대통령이 대(對) 중동정책으로 아브라함 협정만큼은 계승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지만, 전임 행정부의 주요 외교정책 구상에 얼마나 힘을 실어줄지는 미지수인 상태다.바이든 대통령이 취임 직후 대화한 첫 중동 국가 지도자는 요르단의 압둘라 2세 국왕이다. WP는 "요르단은 (아브라함 협정을 맺은) 걸프국가들보다 이-팔 사이에 훨씬 더 직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국가인데, 앞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요르단의 게이트키퍼로서의 역할을 무시했었다"면서 "이런 점을 반영하듯 현재 요르단과 이스라엘의 관계도 미적지근한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최근 이스라엘에서 네타냐후 총리의 입지가 위태로워졌다는 점도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그가 총선 이후 우파 연합정부를 구성하는 데 실패하면서 정부 구성 권한이 중도성향의 반(反)네타냐후 연합에게 돌아간 상태다. 발리 나스르 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대학원장은 최근 자신의 SNS에 "이스라엘이 왜 수면 아래 잠자고 있던 팔레스타인 문제를 격랑의 위기로 끌어올렸는지 되짚어봐야 한다"고 꼬집었다.
현재로서는 아브라함 협정의 효과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나온다. 비영리단체 '아랍-영국 이해위원회(CAABU)'의 크리스 도일 국장은 "아랍국의 왕가들은 여론에 매우 민감하다"면서 "가자지구에서의 폭격이 대중의 더 큰 불만을 불러일으키기 전에 어떻게 해서든 이 갈등을 무마하고 싶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왕정체제를 유지하고 있는 대부분의 아랍국가들이 공식적으로는 이-팔 갈등이 더 표면화되지 않도록 '관리'하면서도 국민들의 분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물밑에서 서둘러 갈등을 봉합하려 할 것이란 분석이다.
김리안 기자 knr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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