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때리기'…펀드 수탁 수수료만 올렸다

입력 2021-05-31 17:38   수정 2021-06-01 03:21

A자산운용사는 최근 국내 연기금에서 의뢰받은 수천억원을 해외 재간접 펀드에 투자하려다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사모펀드 수탁(자산 보관 및 관리)을 위한 입찰에서 한 은행이 펀드 설정액의 0.07%를 수수료로 요구했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수준(0.01%)보다 일곱 배나 높았다. A사 관계자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은행에 0.04%의 수수료를 주고 위탁하기로 했다”고 했다.

라임·옵티머스 등 잇단 사모펀드 부실 사태 이후 은행의 펀드 수탁 수수료가 최대 일곱 배가량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사모펀드를 판매한 은행에 대한 금융당국의 중징계가 이어지면서 수탁업무를 꺼리는 곳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과도한 ‘판매사 때리기’가 펀드 시장 생태계를 왜곡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지적이 나온다.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자산운용업계와 은행 간 사모펀드 수탁 수수료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하고 있다. 국내 연기금이 해외 대형 사모펀드에 투자할 경우 통상 판매사와 판매대행사(국내 증권사)가 설정액의 최대 1%가량의 판매 수수료를 받아간다. 여기에 자산운용사도 0.1~0.2%의 운용보수를 받고 이 가운데 0.010~0.015%를 수탁사(은행)에 지급한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은행들이 지난해부터 수탁을 아예 받지 않거나 최소 몇 배의 수수료를 요구하고 있다”며 “중소 운용사는 이익을 내기 힘들다”고 주장했다.

금융감독원은 이날 사모펀드 사태 재발 방지를 위해 은행 등 수탁업자의 책임 범위를 강화하는 내용의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수탁 가이드라인 나왔지만…은행은 불만
금융감독원이 31일 내놓은 ‘수탁 업무 처리 가이드라인’에 따라 은행 등 사모펀드 수탁 기관은 오는 6월 28일부터 직접 펀드 자산을 관리·감독한다. 그동안 모호했던 수탁 회사의 의무와 책임을 명문화해 은행과 운용사 간 갈등 해결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금융당국은 기대하고 있다. 반면 은행권은 “수탁사의 책임이 지나치게 커졌다”며 “은행의 관련 업무 기피로 수수료가 천정부
지로 높아질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한다.

금융당국에 따르면 수탁 회사는 △집합투자 재산(펀드 자금) 보관·관리 △운용 지시에 따른 자산의 취득 및 처분 이행 △수익증권 환매대금 등 지급 △운용 지시 등에 대한 감시 등 의무를 진다. 전문 인력을 채용해 투자 설명서와 자산 운용보고서의 적절성, 집합투자 재산의 평가 및 기준가격 산정 등의 과정도 점검해야 한다.

매일 챙겨야 하는 감시 체크리스트만 53개에 달한다. 또 분기마다 운용사와 각 투자자의 자산 보유 내역을 비교해 이상이 없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미심쩍은 부분이 있다면 운용사에 자료 제출이나 시정을 요구할 수 있고, 이행을 거부하면 금감원에 즉시 보고해야 한다. 금감원 관계자는 “수탁 회사의 책임과 의무 범위에 대한 불확실성이 해소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단 별도의 수탁 거부 제한이나 수수료 규제 없이 시장 자율에 맡기기로 했다.

그러나 이 같은 가이드라인이 ‘수탁 전쟁’을 끝낼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시각이 엇갈린다. 한 은행 관계자는 “가이드라인을 금감원과 자산운용업계를 대변하는 금융투자협회가 만들면서 은행 입장이 덜 반영됐다”며 “앞으로 펀드 사고 때 은행이 리스크를 질 가능성이 더 높아졌기 때문에 수탁을 더욱 꺼리게 될 것”이라고 했다.

반면 자산운용사들은 은행이 과도하게 수수료를 높이고 있다고 비판한다. 한 운용사 관계자는 “일반 투자자를 상대로 파는 사모펀드야 그렇다 치더라도 대형 기관이 투자하는 수수료까지 급격히 올리는 것은 과도한 갑질”이라고 주장했다.

정소람/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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