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메모리얼 데이(현충일) 연휴를 맞아 자동차 여행을 떠난 상당수 미국인은 치솟은 경비 때문에 속을 태워야 했다. 무엇보다 휘발유 가격이 단기간 너무 많이 뛴 탓이란 게 CNN 등 현지 언론의 설명이다. 미국자동차협회(AAA)에 따르면 미국 내 휘발유 가격은 지난달 기준 갤런(약 3.8L)당 평균 3.04달러로, 2달러를 밑돌던 1년 전보다 60% 넘게 급등했다. 2014년 이후 7년 만의 최고치다.
벤치마크로 쓰이는 북해산 브렌트유 가격은 이날 1.3% 오른 배럴당 70.25달러로 장을 마쳤다. 배럴당 70달러를 돌파한 것은 2019년 5월 이후 처음이다.
원유는 팬데믹(전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이 터졌던 작년 상반기만 해도 국제 상품 시장에서 찬밥 신세였다. 지난해 4월 20일엔 WTI 선물 가격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배럴당 -37.63달러)를 기록했다. 각국의 봉쇄 조치로 글로벌 경제가 일제히 멈춰섰던 탓이다. 미국에 이어 세계 2, 3위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가 가격을 경쟁적으로 낮추는 ‘치킨 게임’까지 벌였다. 원유를 사도 수송하거나 쌓아둘 곳이 없어 ‘패닉 셀(공포 투매)’이 발생했다.
작년 하반기부터 슬금슬금 오르던 국제 유가는 올 3월 단기 고점을 찍은 뒤 하락했다가 지난달부터 급등세다. 원자재 정보업체인 우드맥킨지의 앤 루이스 히틀 분석가는 월스트리트저널과의 인터뷰에서 “현재의 원유 공급량은 갑자기 늘어난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수요가 급증하고 있지만 산유국은 팬데믹 이후 유지해온 감산체제에 큰 변화를 주지 않고 있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과 비회원 산유국 간 협의체인 OPEC+(총 23개국)는 지난 1일 정례회의를 열었지만 종전의 점진적인 감산 계획을 다음달까지 유지하기로 했다. OPEC+는 성명에서 “산유국 간 감산 완화 의지를 재확인했다”며 “다만 증산 속도는 추후 시장 상황에 따라 결정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당장 추가 증산에 나서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앞서 OPEC+는 지난 4월 회의에서 ‘5월부터 3개월간 감산 규모를 단계적으로 줄인다’는 데 합의했다. 별도로 사우디는 자체 시행했던 하루 100만 배럴 규모의 감산량을 축소하기로 했다. 이 합의에 따라 다시 늘게 되는 생산량은 5월에 하루 60만 배럴, 6월 70만 배럴, 7월 88만1000배럴이다. 누적 개념이어서 7월엔 하루 218만1000배럴씩 더 생산한다지만, 글로벌 석유 수요가 작년 대비 하루 600만 배럴 이상 늘어날 것이란 자체 전망치보다 여전히 부족한 양이다.
OPEC+의 시장 전망도 유가 상승을 부채질한 또 다른 원인으로 작용했다. OPEC+의 장관급 감시위원회(JMMC)는 “미국과 유럽, 아시아 경기가 회복하면서 하반기엔 수요가 더 개선될 것”이라고 밝혔다. 압둘 아지즈 빈 살만 사우디 에너지 장관은 “경제 재개에 따라 원유의 수요 회복 신호가 뚜렷하다”고 강조했다.
주요 변수는 산유국인 이란의 핵합의 타결 여부가 꼽힌다. 타결 후 미국이 이란에 대한 제재를 풀면 이란산 원유(하루 최대 650만 배럴)가 대거 시장에 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변이 바이러스 확산에 따른 재봉쇄 가능성도 남아 있다.
고유가가 미국 등 주요국 물가를 자극하면서 조기 긴축을 압박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미국의 지난 4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작년 같은 기간보다 4.2% 급등해 13년 만의 최고치를 나타냈다.
뉴욕=조재길 특파원 road@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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