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형 건설사는 지난 4월 초만 하더라도 유통대리점으로부터 t당 80만원가량의 도매가격에 철근을 공급받았다. 하지만 이달 들어 도매가격은 t당 120만원대까지 치솟았다. 회사 관계자는 “스폿(단발성) 물량 가격이 t당 135만원까지 치솟았지만 철근 공급이 사실상 끊기면서 이마저 구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건축공사 핵심 자재인 철근 품귀현상에 따른 ‘철근파동’이 장기화되면서 건설업계가 최악의 위기에 처했다. 가격 급등으로 철근 가격체계가 무너지면서 유통시장에서 철근이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제강사→유통대리점→건설사’로 이어지는 철근 유통시장의 붕괴가 중소형 건설사들에 직격탄이 되고 있다.
8일 철강업계에 따르면 현대제철과 동국제강, 대한제강 등 국내 7대 제강사는 이달부터 10대 대형 건설사에 공급하는 철근 기준가격을 t당 80만3000원에서 84만5000원으로 5.6% 인상했다. 유통대리점에 공급하는 기준가격은 t당 80만3000원에서 15.2% 올린 92만5000원으로 책정했다.
이번 가격 인상은 그동안 건설사와의 사전 합의를 거쳐 분기 단위로 해온 계약 관행을 깨고 이뤄졌다. 통상 제강사와 대형 건설·유통사들은 2011년 이후 매 분기 시작에 맞춰 1, 4, 7, 10월에 3개월 단위로 공급 계약을 맺어왔다. 하지만 이번엔 제강사들이 원자재인 철스크랩(고철) 가격 급등을 이유로 한 달 먼저 철근가격을 대폭 인상했다. 제강사들은 대형 건설사와 유통대리점에 넘기는 기준가격도 이원화했다. 대리점이 얻는 유통마진을 흡수해 시장을 안정화시키겠다는 이유에서다.
기준가격과 스폿(현물) 거래가인 시중 유통가격과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 제강사들의 설명이다. 지난 3월 t당 4만원이던 두 가격 간 격차는 지난 2일 기준 50만원까지 벌어졌다. 유통가격은 2일 기준 t당 135만원을 기록했다. 최근 한 달 새 47.0% 급등했다. 2008년 4대강 사업 당시 기록했던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대형 건설사는 기준가격에 기반한 공급계약을 체결하는 반면 중소형 건설사는 유통대리점으로부터 도매가로 철근을 공급받는다. 중소형 건설사는 공급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어 시중 유통가격으로 철근을 사와야 한다. 철근파동이 본격화된 후 중소형 건설사들의 공사현장에서 철근을 찾기 어려운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제강사들은 현 기준가격 체제로는 철근시장 왜곡을 막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2011년 도입된 기준가격은 철근 수급에 따라 변동이 큰 유통가격 대신 3개월 단위 고시를 통해 가격을 안정화시키자는 취지에서 도입됐다. 한 제강사 관계자는 “원자재 가격이 급등하는 현 상황에서 분기별로 책정된 기준가격 탓에 원가가 제때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며 “일부 유통대리점의 지나친 폭리가 철근시장을 왜곡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유통대리점에 공급하는 기준가격을 대폭 올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철근의 최종 소비자인 건설업계는 원자재 가격 급등에 따라 철근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는 점엔 공감하고 있다. 다만 제강사가 기준가격을 일방적으로 인상한 것이 철근 유통시장 붕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절대적 공급자 우위 상황에서 지난 10년간 ‘제강사→유통상→건설사’로 이어지는 유통구조가 완전히 깨져버렸다는 판단에서다. 건설사 관계자는 “철근 유통시장은 제강사와 유통대리점 및 건설사가 유기적으로 연계된 구조”라며 “기준가격 체계 붕괴로 유통기능이 악화돼 시장에서 철근이 사라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철근 파동을 잠재울 수 있는 수단은 공급을 확대하거나 수요가 줄어드는 것이다. 정부는 최근 철강업체와의 긴급 간담회를 통해 올 2분기엔 철근 생산량을 1분기 대비 22% 늘어난 273만t으로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월간 기준으로 91만t으로 국내 7대 제강사들이 생산라인을 풀가동했을 때의 생산량이다. 제강사들은 이미 지난 4월부터 생산라인을 전면 가동하고 있어 철근 공급을 단기간에 대폭 늘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현 상황이 계속된다면 내달 철근가격이 또다시 급등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올여름 장마가 빨리 찾아와 건설 공사 현장이 멈추는 것이 철근파동을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고 털어놨다.
강경민 기자 kkm1026@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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