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기업들이 ESG(환경·사회·지배구조)에 헤매는 이유는 질문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기업이 ‘어떻게 하느냐(how)’를 묻는데, 그보다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우리는 왜(why) ESG를 하는가’를 묻는 겁니다.”
로버트 김 캡록그룹 자산운용책임자는 국내 ESG 논의 흐름에 대해 한 마디로 “질문의 방향이 틀렸다”고 말했다. 캡록그룹은 미국의 멀티 패밀리오피스로 500억~5000억원 규모의 자산을 소유한 개인과 가족, 재단 150여 곳을 고객으로 두고 있다. 관리하는 자산만 약 65억 달러(7조3000억원)다. 이 가운데 약 15%에 해당하는 10억 달러(약 1조2000억원) 정도를 ESG 기반 투자에 쓰고 있어 ESG에 특화된 회사라는 평을 받고 있다.
수익성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ESG의 가치까지 확보한 투자 포트폴리오를 가졌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한국계 미국인인 그에게는 연일 한국 기업으로부터 문의가 쏟아지고 있다. 지난 5월 중순까지 약 한 달간 국내에 체류했는데, 이때도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보냈다. 국내 여러 기업들로부터 “세계 ESG 트렌드 좀 알려달라”거나 “우리 기업 ESG 상황에 대한 조언을 해달라”는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그런 그에게 국내 ESG 상황에 대한 진단을 요청했더니 “할 말이 많다”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비슷한 질문을 여러 곳에서 받았다”며 “미국 내에서 손꼽히는 ESG 전문가이면서 한국 상황도 이해하고 있는 파트너와 함께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그가 추천한 파트너는 미국 재단법인 ‘액세스벤처스(Access Ventures)’의 브라이스 버틀러 창립자 겸 총괄이사다. 액세스벤처스는 1600만 달러(180억원) 규모의 자산 가운데 약 93%를 ESG에 투자하고 있다.
지난 6월 27일, 두 사람과 화상으로 대담을 진행했다. 이들은 “외부 평가에 끌려다니기보다 기업이 스스로에게 ESG를 왜 해야 하는가를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기업 스스로 ESG를 하는 이유를 고민해야 한다고 했다. 한국에선 이런 논의가 부족하다는 뜻인가.
로버트 김 캡록그룹 자산운용책임자(이하 김 자산운용책임자): 그렇다. 물론 여러 기업이 적극적으로 나선다는 점은 반갑지만, ‘어떻게 하면 점수를 잘 받을까’만 고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아쉽다. ESG 평가는 과정 중 하나다. 중요한 것은 기업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가 겪는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그것을 자신의 핵심 비즈니스와 어떻게 연결시킬지를 찾는 것이다.
브라이스 버틀러 액세스벤처스 총괄이사(이하 버틀러 총괄이사): 전 세계적으로도 그런 고민에만 매몰되다가 ‘그린워싱’으로 이어진 경우가 많다. 물론 지역사회에 기여한다는 식의 이미지는 좋은 마케팅 전략이겠지만, ESG는 마케팅이 아니라 중요한 경영적 결단이다. 기업 스스로 사회가 겪는 문제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는 자기 정체성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문제에 깊이 뿌리내린 기업’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버틀러 총괄이사: 우리 기업의 핵심 비즈니스와 그걸 해 나가는 과정이 사회 문제와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찾는 것이다. 우리 회사의 아주 근본적인 비즈니스 결정을 어떻게 사회와 조화시켜야 할지 그 접점을 찾는 일이라고 보면 된다.
김 자산운용책임자: 이 지점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과 ESG의 근본적인 차이다. CSR은 홍보·마케팅 부서가 담당할 수 있지만 ESG는 최고경영자(CEO) 직속으로 운영돼야 한다.
-기업 스스로 자신들의 ESG 원칙을 만들라는 것인가.
김 자산운용책임자: 외부 평가에 의존하다가는 제대로 된 ESG 전략을 세울 수 없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의 핵심 비즈니스가 어떤 ESG 모델과 가장 관련이 있는지 따져보고, 그를 추진할 구체적인 방법을 스스로 마련해 가면 된다.
버틀러 총괄이사: 예를 들어 액세스벤처스의 목표는 ‘포용적 금융’이다. 저소득층의 소규모 자영업에 투자하거나 대출을 해줘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러니 우리는 사회(S) 요소를 가장 중시한다고 스스로 정의한다. 영세 자영업자를 위한 솔루션이나 여성 자영업자를 대상으로 하는 지원을 만들기도 한다. 이렇게 하다 보면 기업 스스로 자신들의 ESG 철학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김 자산운용책임자: 한국의 경우, 반대로 ESG 관점으로 따져봤을 때 가장 어려운 점이 뭔지를 거꾸로 짚어보는 것도 좋다. 대기업과 영세 기업 간의 격차, 성평등이나 빈곤 문제 등 공동체가 가진 문제를 비춰보며 기업이 할 일을 찾는 것도 방법 중 하나다.
-최근 ESG를 강조해 온 다논의 최고경영자(CEO)가 해임되는 등 ESG에 대한 지나친 강조가 경영 악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버틀러 총괄이사: 그건 ESG 원칙과 경영 실패를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연결해 생긴 오해다. 다논의 경우는 ESG가 아니라 마케팅 등 다른 경영적 판단 실패로 수익성이 떨어졌다. ESG는 수익성을 희생하는 개념이 아니다. 대표적인 예가 파타고니아다. ESG 요소를 잘 지키고 마케팅 등 경영 전략을 잘 취하면서 시장에서도 폭발적으로 성공하고 있다.
김 자산운용책임자: ESG가 장기적인 전략이라 단기적인 공격을 받을 수는 있다. 이 과정을 버텨내기 위해서도 특히 중요한 게 ESG 중 지배구조다. 투명한 의사결정 과정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경우 지배구조를 어려워하는 기업들이 많은데, 장기적인 ESG 전환에서 지배구조는 모든 기업이 공통적으로 챙겨야 할 주제다.
버틀러 총괄이사: 기업이 ESG를 지속적으로 추진할 수 있도록 제도적 지원도 필요하다.
-제도적 지원이라면.
버틀러 총괄이사: ‘퍼블릭 베네핏 코퍼레이션(Public Benefit Corporation)’이라는 개념이 있다. 재무적 이익뿐 아니라 지역사회와 공공의 이해를 함께 지켜나가는 기업을 의미하는데, 이들 기업에 대한 보호를 법적으로 명시하는 주도 생겨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미국 켄터키주인데, 지역사회 등 폭넓은 이해관계자에 대한 책무성 강화 조치를 충분히 했다고 평가받으면, 이들 기업의 책임자들은 그 기간 동안 지위를 법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다.
이들은 “ESG는 재무적 수익을 희생하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ESG는 핵심 경영 전략 중 일부로, 기업의 재무적·비재무적 지표 등 성과 여부는 다른 경영적 판단과 맞물려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ESG 역시 경영과 투자 등 ‘실력’의 영역”이라고 했다.
버틀러 총괄이사: ESG 경영과 투자 모두 데이터로 꼼꼼하게 원인과 결과를 분석하는 게 중요하다. 액세스벤처스는 ‘ETHIC’이라는 ESG 인덱스 펀드를 운용하고 있는데, 철저히 데이터 기반으로 움직인다. 고객이 원하는 수익률과 추구하는 가치를 파악한 후 맞춤형 투자 상품을 제공한다. 가치와 수익률을 꼼꼼하게 따져서 결국 최종적인 수익률과 ESG 요소를 맞춘다. ESG 역시 실력으로 증명해내야 하는 경영의 한 요소다.
김 자산운용책임자: 투자는 자기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개인 투자자도, 기업도 자신이 어디에 돈을 쓰느냐에 따라 자신의 철학을 드러낸다. 투자자가 생각하는 미래의 양상을 그리고, 그에 맞는 기업이나 펀드에 돈을 넣는 게 투자 아닌가. ESG 경영 역시 다르지 않다. 세상이 어떻게 바뀔지를 전망하고, 이에 맞춰 경영 전략을 바꿔가는 게 그 기업의 실력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는 국내 상황에 맞는 K-ESG 지표를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김 자산운용책임자: 한국 상황에 독특한 점이 있다는 얘기엔 동의한다. 일부 가문이 거대 기업을 독식하고 있는 재벌 구조 등을 이유로 드는데, 일부 이해가 가는 지점도 있다. 그러나 글로벌 스탠더드를 맞출 필요도 있다. 나무를 심고 ESG를 추구한다고 하는 식으로는 글로벌 리더가 될 수 없다. 이미 SK 등 재벌 구조이지만 ESG를 전면에 내세운 기업들이 있으니, 다른 기업도 못할 건 없다고 본다.
버틀러 총괄이사: 동의한다. 모든 문화가 다르다는 점엔 이견이 없으나, 글로벌 차원의 논의에 적극 참여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한국은 이미 글로벌 경제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거대 기업이 다수 존재하지 않나. 더 이상 한국 기업들의 영업 무대가 국내만은 아니다. 한국 기업의 영업 활동을 감시하는 눈이 한국 안에만 있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글로벌 리더로서의 위상을 갖출 필요가 있다.
박선하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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