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인플레 압력과 최적 통화정책 시대

입력 2021-07-04 17:24   수정 2021-07-05 00:18

조선왕조실록에는 화폐가 부족해 경제활동이 어려운 전황(錢荒)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정조 5년 ‘경외(京外)의 전황은 곡식이 귀한 것보다 더 극심한데, (중략) 근래 들리는 바에 의하면 시정(市井)의 대고(大賈)와 강촌(江村)의 부호(富戶)들도 오히려 전재(錢財)가 핍절(乏絶)되어 급급히 나서서 구하여도 얻을 수 없다’고 화폐를 구하기 어려운 사정을 기술하고 있다.

시중 유동성이 부족해 화폐가치가 상승하는 디플레이션 시기로, 정조 9년 기록에는 ‘판중추부사 이휘지는 말하기를, 조정에서 늘 전황을 우려하였는데 그 폐단을 구제하는 방법은 다만 돈을 주조하는 데에 있으니 그 형세로 보아 주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기술한다. 디플레이션에 대응하기 위해 통화 공급 증가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반면 과도한 화폐 발행으로 물가 상승과 인플레이션이 극심했음을 기술한 숙종 6년 기록도 있다. ‘지방에서는 돈을 주조(鑄造)하여도 능히 통용되지 못하므로 서울에 와 쌓여 있어서 그 가치가 점점 천하여집니다. 조정에서는 돈 4백 문(文)으로 은(銀) 1냥과 값이 같다고 하는데 지금 시가(市價)는 돈 8백 문으로 은 1냥과 같다고 하니, 이 폐단은 참으로 구제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이 뒤로는 지방에서 일체의 돈을 주조하지 못하게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처럼 물가 상승을 제어하기 위해 통화 공급을 줄였다는 언급도 나온다. 무절제한 화폐 발행으로 물가가 상승하며 인플레이션에 시달리자 일부 화폐 발행을 금지해 시중 유동성 공급을 축소한 것이다.

당시 조선 사회에 화폐와 물가에 관한 엄밀한 경제학 이론 체계가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전황으로 상징되는 디플레이션, 화폐가치 하락과 물가 상승을 뜻하는 인플레이션 각각에 정책적으로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경제 환경에 맞는 최적의 통화정책을 구사할 만큼 충분한 독립성을 갖춘 통화당국이 부재한 상황에서, 과도한 재정지출로 정부 재원이 부족해지자 청나라 화폐였던 청전(淸錢)을 밀수입하거나 조정에서 당오전(當五錢)과 당백전(當百錢) 등의 화폐를 과도하게 발행하기도 했고, 그 결과 극심한 인플레이션에 시달렸다는 구한말 기록도 존재한다.

결국 화폐 발행과 통화정책은 정부 재정자금 조달에 휘둘리지 않고 독립적인 지위를 가져야 하며, 물가와 금융시장의 안정을 고려해 통화정책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실은 역사적인 경험과 현대적인 경제학 개념상에 큰 차이가 없다. 현재 한국은행도 안정적인 물가 상승률 관리를 통화정책의 목표로 움직이고 있고, 2019년 이후 물가안정목표는 소비자물가 상승률 기준 전년 동기 대비 2%다. 그러나 최근 들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급등하고 있다. 지난 1월까지 1%에 미치지 못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4월부터 연속 3개월째 2%(4월 2.3%, 5월 2.6%, 6월 2.4%)를 넘어선 상황이다. 직접적인 정책목표는 아니지만, 소비자물가지수와 함께 물가 흐름을 볼 수 있는 주요 지표인 생산자물가지수 역시 1월까지 1%에 미치지 못하다가 2월에 2.1%를 기록했고 5월 6.4%에 이르렀다.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화폐 공급을 증가시켜 유동성을 푸는 것은 불가피했고, 위기 악화를 막는 과정에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처럼 경기 회복과 함께 물가 상승 압력이 나타나는 상황에서는 정책 조정이 필요하다. 과도한 유동성은 자산시장과 금융시장의 가격 불안정성을 높여 경제에 위험요인이 될 수 있다. 물론 소비자물가지수를 기준으로 본격적인 인플레이션이 완전히 불붙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금리를 전혀 조정하지 않다가 인플레이션이 본격화해 갑자기 금리를 큰 폭으로 올려야 하면 상당한 충격이 될 수 있다.

특히 인플레이션 압력이 생기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완화적인 통화정책이 경기를 부양하고 일자리를 창출하거나 경제 성장을 견인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물가 상승과 금융시장 불안정성의 추이를 주의 깊게 관찰하고 적절한 시점에 통화정책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 금리 조정은 거시 환경을 고려할 정책 선택의 문제지, 선악이나 이념 문제와 연결해서는 곤란하다. 금리 인하든 인상이든 최적의 통화정책이 되려면 시의적절성이 방향성 이상으로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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