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씨티銀 철수'가 토종은행 승리라고?

입력 2021-07-08 17:22   수정 2021-07-09 00:17

미국 씨티은행이 한국 소매금융 시장에 뛰어든 지 35년 만에 철수하는 것을 두고 금융계에서 다양한 평가가 나온다. ‘토종은행의 승리’라는 평가도 있지만, 금융산업의 격변을 알리는 신호탄이란 해석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토종의 승리라는 관전평은 선진 금융기법을 전수하며 리테일뱅킹의 최강자였던 씨티가 결국 토종은행들과의 경쟁에서 밀렸다는 것이다. 씨티그룹은 1967년 씨티은행서울지점을 설립했다. 기업금융을 하다가 1986년 소매금융까지 사업을 확대했다.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막 5000달러를 넘어선 1989년에 부유층을 대상으로 프라이빗뱅킹(PB) 서비스를 내놓았다.

1990년 24시간 ATM, 1993년 24시간 폰뱅킹 등으로 새 바람을 일으켰다. 외환위기 이후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은행)’ 체제가 무너지자 2004년 한미은행을 합병해 한국씨티은행을 출범시켰다. 신용대출, 웰스매니지먼트(WM), 해외펀드 등을 내세워 고액자산가들을 충성고객으로 흡수했다.

기업금융에 치중하던 토종은행들은 외환위기 시련을 겪은 뒤 새 수익원을 찾아 소비자금융에 뛰어들었다. ‘씨티 따라하기’가 유행이었다. 2005년 8대 시중 은행장 가운데 6명이 외국계 은행 출신 또는 외국인이었을 정도로 해외파가 득세했다. 신한은행의 라응찬, 하나은행의 김승유, 주택은행(국민은행)의 김정태를 주축으로 한 토종뱅커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은행을 금융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했다. 증권 보험 신용카드까지 아우르는 금융그룹화였다. 시너지와 규모의 경제를 창출했다. 한국씨티은행의 설 자리는 좁아졌고, 한때 210개를 넘었던 점포수는 43개로 줄었다.

그런데 이를 ‘토종의 승리’라고 우쭐하는 건 너무 단선적이다. 씨티가 진짜 두려워한 건 카카오뱅크 토스뱅크 등 빅테크였다. 올해 초 제인 프레이저 씨티그룹 최고경영자(CEO)는 글로벌 사업 재편을 예고하면서 “전 세계가 빠르게 디지털화되는 상황을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카뱅은 출범 3년 만에 1600만 명의 고객을 끌어모았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성장 스토리다. 빅테크의 금융시장 공습에 씨티그룹 본사도 놀랐다고 한다. 디지털전환에는 막대한 투자와 전문 인력이 필요하다. 연간 순이익이 2000억원에도 미치지 못한 한국씨티은행으로선 엄두를 낼 수 없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경직된 고용체계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두 손을 들었다는 분석이다. 한 시중 은행장은 “씨티의 철수는 빅테크가 금융 산업의 판을 뒤흔들자 뒤뚱뒤뚱하고 있는 국내 은행들의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것”이라고 짚었다.

실제 씨티의 지지부진한 소매금융 매각 작업에서 국내 은행산업의 병폐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금융당국자는 “인수의향자가 있다”고 했지만, 인수후보자로 거론되는 대형 금융지주회사들은 “글쎄요”란 반응이다. WM와 카드사업의 부자고객 자산은 매력적이지만 소매금융 부문에 딸린 2400명의 직원을 승계하는 데는 고개를 젓는다. 씨티은행 인력구조는 고령화(40대 46%, 50대 이상 43%)돼 있고, 퇴직금 누진제가 아직 남아 있다. 안 그래도 은행들이 디지털전환을 위해 점포 축소와 인력 축소에 안간힘을 쓰고 있는데 고비용 인력을 떠안을 이유가 없다. 당국자들도 “고용을 승계하는 통매각은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걱정한다.

씨티는 통매각 외에도 부분매각, 단계적 폐지(청산) 등도 검토 중이다. 하지만 노조와 여당 의원들은 고용안정(통매각)을 압박하고 있다. 노조는 언제든지 파업할 수 있도록 이미 쟁의행위를 가결해 놓았다. 관건은 씨티 측이 매수자의 부담을 덜 수 있도록 희망퇴직을 통해 군살을 뺄 수 있느냐 여부다. 이게 안 되면 최악의 시나리오가 불가피하다. 정년제와 호봉제, 강성 노조에 발목 잡혀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빅테크의 파상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토종은행들도 예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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