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장미꽃들이 모여 ‘smile(미소)’이라는 글자를 이룬다. 각기 다른 복장과 자세의 레고 미니피규어(사람 모형)가 구석구석 배치된 모습이 아기자기하다. 청명한 가을 하늘을 연상시키는 배경색 등 선명한 색채와 뚜렷한 선은 컴퓨터 일러스트처럼 밝고 깨끗한 조형미를 연출한다. 하지만 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곳곳에 총과 전투기 등 공격적인 상징들이 숨어 있다. 미니피규어들의 웃는 표정도 어딘가 그늘져 있는 듯하다. 감정 노동을 강요받는 현대인의 괴로움을 표현한 권지현 작가(39)의 ‘smile’이다.
서울 중림동 한국경제신문사 1층 한경갤러리에서 권지현 작가의 초대전 ‘Frame’이 9일 개막한다. 레고 조각의 이미지를 차용해 현대 사회의 인간소외 문제를 다룬 작품 26점을 선보이는 전시다. 권 작가는 2007년부터 레고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레고 장난감을 좋아해 늘 곁에 뒀어요. 그런데 어느 날 레고 장난감을 구성하는 각 조각에 눈길이 가더군요. 어떤 모양의 조각이든 일단 전체 작품의 구성 요소가 되면 개성 없는 부품으로 전락합니다. 수많은 조각이 개성을 잃고 설계자의 의도에 따라 전체의 구성 요소가 되는 모습이 복잡한 사회 속 톱니바퀴가 된 현대인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작품에서는 아크릴 물감의 밝은 색채와 레고 블록의 아기자기한 조형이 심오한 주제와 역설적인 대비를 이룬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현실을 전달하기 위해 택한 수단이라는 설명이다. 간결하고 명확한 선도 마찬가지다. 권 작가는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하며 채색화를 그린 경험이 깔끔한 표현에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권 작가의 작품 세계 변천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2010년대 초반 작품인 ‘Empire from what I know(아는 것들로부터의 제국)’ 연작은 그의 문제 의식을 직접적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레고 블록으로 소총이나 사무실 집기 형태를 구성해 전쟁이나 경제 구조의 부품이 된 인간을 표현했다.
2010년대 중반에 들어 작가의 표현은 은유적으로 바뀐다. ‘Constructed reflectors(건설된 반사체들)’ 연작은 샹들리에와 꼬마전구 등 전구의 이미지를 레고 블록으로 구성했다. 미니피규어의 머리가 모여 샹들리에 모양을 구성하는 작품에서는 밝은 색채와 웃는 표정, 섬뜩한 조형이 대비돼 색다른 느낌을 준다. 태양처럼 직접 빛을 내지 못하고, 전기를 받아 최대한 효율적으로 빛을 낼 수 있도록 구성된 전구의 모습에서 현대인의 모습을 떠올렸다는 설명이다.
근래 들어 권 작가는 관념적인 언어로 표현 영역을 넓혔다. ‘Reboot(재시동)’ 연작은 긍정적인 뜻의 영단어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kind’ 작품에서 글자를 구성하는 리본은 아기자기한 장식품이지만 자신을 묶는 족쇄이기도 하다. 작가는 “콜센터 직원처럼 사회 생활이나 직업을 위해 긍정적인 감정을 강요받는 사람의 고통을 다뤘다”고 설명했다.
권 작가는 2010년 서울미술대상전에서 최우수상을 받는 등 일찌감치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그는 “결혼과 출산 등으로 작품 활동을 쉬다가 최근 재개했는데 이번 전시를 기점으로 창작 활동에 가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달 3일까지.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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