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배터리 분리막 전문업체 WCP(더블유씨피)의 전환사채(CB) 매매를 놓고 KDB산업은행과 이베스트-BEV신기술조합(이베스트조합)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WCP의 CB 800억원어치를 보유하고 있는 산은이 이베스트조합과 매매계약을 맺은 뒤 이 CB의 우선매수권을 가진 WCP가 이를 행사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양측은 우선매수권의 행사가 계약서 이행보다 우선하는지 아닌지를 놓고 각기 다른 입장을 보이고 있다.
5일 이베스트조합측은 "WCP의 우선매수권 행사보다 이베스트조합의 매수계약서가 선행한다는 조건의 계약서를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에 따르면 지난달 8일 이베스트조합은 산은에 계약금을 납부하고 같은 달 29일 잔금을 지급키로 했는데, 이틀 전인 지난달 27일 산은으로부터 WCP가 우선매수권을 행사키로 했다는 통보를 받았다. 우선매수권이란 매도인이 제3자에게 자산을 매각하기 전 그와 같은 조건으로 우선해서 살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WCP가 가진 우선권이기 때문에 산은-이베스트조합의 계약과 무관하게 행사할 수 있다는 게 산은과 WCP측의 설명이다.
KDB산업은행 관계자는 "우선매수권 행사 방식 중 상대측(이베스트조합)과 같은 조건으로 행사할지를 물어보는 방식이었고 이는 매우 일반적"이라며 "계약효력이 상실했다는 걸 이베스트조합에 통보했지만 계약금을 돌려받을 계좌번호를 알려주지 않고 버티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이베스트조합측은 "계약서 파기권한이 매도측인 산은에는 없고 매수측인 이베스트조합에 있기 때문에 산은이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며 "비밀유지확약에 따라 계약서 문구를 정확히 밝힐 순 없지만 우리 계약이 WCP의 우선매수권보다 선행돼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고 반박했다.
이번 논란의 핵심은 계약서의 실제 내용이다. 이베스트조합측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산은은 우선매수권자가 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계약서를 작성한 게 된다. 산은의 주장대로라면 이베스트조합측이 계약금 반환을 거부하며 '몽니'를 부리는 상황인 셈이다.
산은의 입장을 잘 아는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만약 진짜 계약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면 이베스트조합이 법적 대응을 하면 될 일"이라며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기 때문에 보도자료를 내고 언론플레이를 하는 것 아니겠냐"고 했다.
반대로 산은이 난감한 상황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이베스트조합과 계약 과정에서 산은이 "WCP로부터 우선매수권 포기 공문을 곧 받아주겠다"고 구두로 약속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어서다. 익명을 요구한 IB업계 관계자는 "산은이 먼저 이베스트조합측에 계약 종료일을 앞당기자고 제안할 정도로 매도를 서둘렀는데 갑자기 이렇게 된 건 물 밑에서 다른 꼼수가 있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또 다른 이슈는 우선매수권을 제3자에게 배정할 수 있느냐다. 이베스트조합측은 WCP가 우선매수권을 행사할 때 키움캐피탈을 통해 행사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 우선매수권 행사 대상자는 키움캐피탈이 업무집행조합원(GP)인 신기술조합이라는 점이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IB업계 관계자는 "우선매수권을 제3자에게 배정하는 일은 다반사"라며 "이미 키움캐피탈조합이 7월29일까지 대금 납입하고 우선매수권을 행사해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이라고 반박했다.
이번 일이 발생한 핵심 원인은 WCP가 내년 상반기 중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있다는 데 있다. 현재 CB를 우선 확보해두면 IPO 이후 적게는 두 배에서 많게는 3~4배까지 높은 투자수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게 IB업계의 전반적인 평가다. 현재 WCP의 기업가치는 1조 중반대에서 2조 중반대까지 평가자마다 다른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 WCP측은 경쟁사인 SKIET의 시가총액이 15조원대인데 WCP의 생산량이 SKIET 대비 40% 수준, 실적은 30% 수준이라는 점에서 WCP가 기업공개(IPO) 후 최소 3조 중반대의 기업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보고 있다. 현 시점에서 2조 중반대의 가치를 주장하는 이유다.
이에 대해 인수합병(M&A)업계 관계자는 "WCP의 현재 기업가치를 놓고 WCP의 CB를 매각 중인 산은, 또 다른 CB의 매도측인 노앤파트너스의 수치가 다른 것으로 안다"며 "이 점도 이베스트조합측이 문제제기를 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말했다. 노앤파트너스는 현재 보유 중인 WCP의 CB 지분 32% 중 10%가량을 매도 중이다. 20곳 가까이 원매자들이 인수의향서(LOI)를 제출한 상태다.
산은과 이베스트조합 양측의 주장이 첨예하게 엇갈리면서 장기전이 불가피하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산은이 '계약효력 상실'을 통보하긴 했지만 양측의 계약서가 파기되진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양측의 입장을 잘 아는 IB업계 관계자는 "어느 누구도 법적 소송까지 가는 걸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베스트조합과 신기술조합측이 합의해서 함께 매수하는 등 합의점을 도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며 "누군가 양보하지 않으면 끝나기 어려운 싸움인 건 분명하다"고 분석했다.
민지혜 기자 spo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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