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농단' 사건으로 재수감됐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가석방이 허가되면서 향후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특별사면이 아닌 가석방인 만큼 당장 현장 경영에 뛰어들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나오면서도, 그간 미뤄왔던 미국 내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공장 건설 등 세부 투자 사안 결정에는 속도를 낼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10일 재계에 따르면 이 부회장은 광복절에 앞서 오는 13일 오전 10시 서울구치소에서 풀려날 예정이다. 이 부회장은 당분간 자택에 머무르며 건강을 추스르는 데 집중할 전망이다.
지난 1월18일 재수감돼 오는 13일까지 207일의 수감 생활을 하는 동안 이 부회장의 체중이 10kg 가까이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 부회장은 이번 수감 기간 중 급성 충수염 수술을 받는 등 체력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와 함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4차 대유행인 상황도 겹치면서 이 부회장이 당분간은 대외활동을 자제할 것이란 분석에 힘이 실린다.
이 부회장이 가석방으로 풀려나도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5억원 이상의 횡령·배임죄로 징역형을 받으면 형 집행 종료 뒤 5년까지 취업 제한이 적용돼 등기임원 등으로 복귀할 수 없다. 가석방 신분으로는 내년 7월 형기 만료 전까지 경영 복귀는 물론 해외 출장도 제약을 받는다.
다만 미뤄왔던 투자 결정에는 속도가 붙을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그만큼 사안이 급박해서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을 계기로 약 170억달러(약 19조4000억원) 규모의 미국 내 두 번째 파운드리 공장 투자 계획을 밝혔지만 세 달 가까이 지나도록 아직 부지 선정조차 마치지 못했다.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이미 입지와 미국 주(州) 정부의 세제 혜택 등을 고려해 후보지 물색을 마쳤지만 최종 의사 결정권자인 이 부회장의 마지막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다만 가석방 결정이 내려진 지 얼마되지 않은 데다가 코로나19 확산과 자유롭지 않은 해외출국 상황 등을 고려할 때 미국 출장이 곧장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
최근 반도체 업계는 빠르게 주도권 다툼의 소용돌이 속으로 휘말리고 있는 형국이다. 파운드리 시장에서 세계 1위인 대만 TSMC와 삼성전자의 점유율 격차는 올 들어 더 벌어지고 있다. 쫓아가는 입장인 삼성은 더 속도를 내 투자를 해야한다. 하지만 이 부회장의 거취를 비롯해 안팎의 상황은 녹록치 않다.
TSMC는 지난 4월 향후 3년 동안 1000억달러(약 115조원)을 투자한다는 계획을 발표한 데 이어 5월에도 미국 애리조나주에 반도체 공장 5개를 추가 건설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와 3나노 양산 경쟁을 벌이고 있는 TSMC는 최근에는 대만 공장에 3나노 장비 반입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 세계 최대 반도체 업체인 인텔도 조 바이든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발판으로 파운드리 시장 재진출을 선언, 34조원 규모로 예상되는 세계 4위 파운드리업체 글로벌파운드리 인수에 나서면서 삼성전자를 압박하고 있다. 오는 2025년에 2나노 칩을 양산하겠다고도 선언했다.
파운드리와 함께 삼성SDI의 미국 내 전기차 배터리 공장 건설, 삼성바이오로직스의 코로나19 백신 생산 투자 등도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삼성SDI는 국내 주요 배터리 기업 중 유일하게 미국 생산기지를 마련하지 못했다. 경쟁사인 LG에너지솔루션과 SK이노베이션은 이미 미국 생산기지를 마련한 데 비해 삼성SDI는 현지에 배터리 팩 조립 공장만 보유하고 있다. 배터리 셀은 해외에서 들여와 조립 생산만 하고 있다. 업계에 따르면 미국은 향후 자국 내에서 80% 이상 생산·조립된 전기차 부품에만 관세 면제 혜택을 줄 예정이어서 현지 생산기지 구축은 배터리 업체에 필수다.
코로나19가 다시 대유행으로 번진 상황 속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가 맡은 모더나 백신 위탁생산 등이 이 부회장의 우선 관심사가 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도 나온다. 삼성바이오로직스는 당장 이달 말부터 모더나 백신 완제품 시범생산을 계획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중 일부를 국내용으로 돌릴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한국경영자총협회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 발표 후 입장문에서 "삼성전자는 이 부회장의 가석방으로 총수 공백이라는 경영 리스크가 일정 부분 해소된 만큼 이 부회장의 리더십을 중심으로 적극적인 투자와 기술개발로 세계 1위 반도체 강국으로서 지위를 확고히 다지고 국가경제 발전에 더욱 기여해 주길 바란다"고 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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