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초 글로벌 투자은행(IB) A사의 한국지사는 한 중소형 증권사 B사에서 부장급(3~5년차) 인력을 급히 수혈했다. 대형 인수합병(M&A) 자문이 진행되던 중 4년차 인력이 스타트업으로 이직해버렸기 때문이다. B사도 부랴부랴 컨설팅사와 회계법인에서 인력을 데려왔다. B사 대표는 “어느 순간부터 인재 피라미드 최상단에 스타트업이 자리잡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직업 선호도를 보면 유망 스타트업이 1순위 자리를 차지하고 이어 사모펀드(PEF) 운용사 혹은 벤처캐피털(VC), 그 뒤에 ‘컨설팅펌, IB’ 순으로 바뀌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젊은 인력 이탈로 글로벌 IB 한국지사의 인사팀은 바빠지고 있다. 최근 인력관리(HR) 스타트업 레몬베이스, 에듀테크 스타트업 등으로 연차를 가리지 않고 직원들이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JP모간, 모건스탠리도 주니어들의 이탈로 인력난을 호소하고 있을 정도다.
글로벌·국내 대형 PEF도 상황은 다르지 않다. 베인캐피탈 한국사무소 내 부장급 인력은 최근 넷플릭스로 이직했다. 1조원 규모 블라인드펀드를 보유한 국내 PEF 한 곳의 2년차 직원도 스타트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앤컴퍼니 출신 부장급 인력은 회사를 떠나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데이터헌트를 창업했다.
스타트업들이 IB 인재를 끌어들이는 것은 상장이나 투자유치에 바로 투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내외 잠재 투자자들에게 IB 출신 인력풀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는 점도 부수적 효과다.

최근 3조원 몸값을 인정받은 당근마켓과 소프트뱅크로부터 2조원을 수혈받은 야놀자도 IB 혹은 투자 경험이 있는 인재를 충원하기 위해 물밑에서 접촉 중이다. ‘토스’ 운영사 비바리퍼블리카도 글로벌 증권사 CLSA, 국내 PEF운용사 LB PE 출신 인력이 M&A와 투자유치를 전담하는 코퍼레이션디벨롭먼트(Corp Dev) 팀에서 활동 중이다. 지난해 JP모간 출신 주니어 인력을 영입해 추가 투자유치 및 기업공개(IPO) 업무를 맡겼다. 학습앱 ‘콴다’를 운영하는 매스프레소도 올해 씨티그룹 IB에서 IPO 업무를 담당한 남연수 씨를 최고재무책임자(CFO)로 임명한 데 이어 전략컨설팅사 맥킨지앤드컴퍼니·베인앤드컴퍼니 출신 인력들을 영입했다.
국내 IB·PEF 특유의 수직적 기업문화도 주니어들의 이탈 요인이다. 사내에서 민감한 문제로 꼽히는 ‘성과 분배’와 관련해 자기 목소리를 내는 기조도 점점 강해지고 있다. 일부 주니어들은 한국 특유의 ‘영업 문화’에 시달리느니 꿈많고 깨어있는 또래들과 일하겠다며 회사를 떠났다.
‘롤모델’이 업계를 떠나는 것도 주니어들을 자극하고 있다. IB에서 성공 기준은 매니징디렉터(MD)다. 모건스탠리 MD에 오른 안재훈 전무는 올해 SK바이오사이언스로 자리를 옮겼다. 올해 IB 시장이 초호황인 점을 고려하면 수십억원의 보너스를 포기하고 기업행을 택했다는 평가다.
차준호 기자 chacha@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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