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를 알기 위해 맥락을 살펴보면 최 전 원장은 제왕적 무소불위 대통령의 역할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것인데, 그러기 위해 ‘삶을 책임지겠다’는 식의 지나친 약속을 하지 않겠다는 언급이었다. 그다음 정부의 역할을 설명하며 ‘국민의 삶’을 책임져 주는 일에 집중할 것이 아니라 ‘국민이 역량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는 일’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했다.
이런 발언에 대해 여야 대선후보들은 “무정부를 꿈꾸는가” “국민의 삶은 나 몰라라 하는 정부를 추구하나”라며 반발했다. 하지만 최 전 원장은 이미 다른 방식의 정부 책임, 즉 ‘국민이 스스로 역량을 펼치게 하는’ 역할을 제시했다. 이 때문에 반발은 ‘허수아비 때리기’식 논리 오류다.
이렇게 대선의 계절에 국민이 속으면 안 된다. 자신이 집권하면 ‘여러분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정치인의 말은 후견주의 포퓰리즘 약속일 뿐이다. 본질은 네 삶을 후견해줄 테니 표를 달라는 매표 행위다. 표를 가진 국민이 복지 수혜, 의료 보장, 현금 지원 등에서 더욱더 ‘책임져 주기’를 바라게 될 것이고 요구를 들어주다 보면 나라 재정은 파탄으로 가게 된다. 나라를 부자와 빈자, 지지세력과 반대세력으로 쪼개고 국가 재정을 거덜 내는 것이 포퓰리즘이다.
더불어민주당의 한 대선후보는 ‘국민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인데 포퓰리즘이 뭐가 나쁘냐고 반문(反問)한다. 하지만 통합이 필ㅁ요한 시기에 지지자와 반대자로 나라를 두 동강 내고 부유층에게 빼앗아 가난한 계층에 나눠 주며 나라를 하향평준화 후퇴시켜 온 베네수엘라, 브라질을 기억해야 한다.
정부가 국민 삶을 ‘몽땅’ 책임진다는 것은 국민을 유모국가(nanny state) 속 노예의 삶으로 이끄는 전체주의가 될 것이다. 북한을 보면 확실하다. 북한 주민은 ‘어버이 수령이 내 삶을 책임져 주는 지상낙원’(?)에서 행복만 느껴야 하는 노예가 된 지 어언 76년이다. 자식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교육시키는 것이 부모의 책무인데 마마걸, 마마보이로 키워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의존적 인간으로 만드는 북한 정권을 ‘바른 정부’라고 할 수는 없다.
‘몽땅’ 책임져 준다면 개인의 자유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책임져 주니 무조건 따르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사상의 제1원칙은 ‘개인의 자유와 책임’이다. 노예는 자유도 책임도 없지만, 자유인에게 자유와 책임은 하나다. 따라서 자유 선진국일수록 정부의 간섭보다 국민의 자유와 책임을 우선한다. 미국 ‘독립선언문’은 “모든 인간이 자신의 생명, 자유, 행복 추구권을 가지며 어떠한 정부라도 그런 목적들을 파괴하는 경우 정부를 바꾸거나 없애 버릴 수 있음”을 선언했다. 스위스 연방헌법 제6조는 “모든 사람은 자신에 대해 책임지고, 국가와 사회의 과제 달성을 위해 능력에 상응해 공헌한다”고 개인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2022년 3월의 대선은 대한민국이 실패한 사회주의를 반복하며 ‘노예의 삶’으로 전락할지 아니면 자유 인간으로 존엄을 지킬지 선택하는 선거가 될 것이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는 만능정부’ 환상에 추가로 대선후보 경쟁에서 나타나는 또 다른 어두운 전조가 있다. 복지 혜택 확대 공약쯤은 옛날이야기가 돼버렸고, 수천만원의 현금 지급이 대세가 됐다. ‘코로나19 위로금’ 지급 이후 더불어민주당뿐만 아니라 국민의힘 대선후보도 따라하며 수백, 수천만원대 현금 지급의 ‘허경영식 공약’이 보편화되고 있다. ‘국민의 삶 책임’에서 ‘몽땅 책임’으로 그리고 대규모 현금성 지급이라는 마약 공약으로 선거 지형이 바뀌고 있다.
하지만 큰 정부로 모든 것을 약속하며 출발했던 현 정부가 일자리, 부동산, 백신, 북핵 등 마음먹고 개입하는 정책마다 실패하고 있는 모습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이 정부를 결정하는 민주주의에서는 국민 수준의 정부를 가진다고 한다. ‘국민의 삶을 책임지겠다’는 만능정부 약속이나 현금 지급 공약이 아니라 문제 해결 능력을 판단할 때 나라의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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