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가 자랑하는 특급 물리학자 알랭 아스페 교수는 서울과 대전 등 몇 군데에서 학생과 일반인들을 위해 양자물리학 강연을 했다. 프랑스 대사관에서 준비한 팸플릿에 소개된 그의 업적 중에 갑작스레 법률용어가 등장했다. 벨의 불평등성 위약? 주로 법률·사회·정치 용어에 익숙한 통역사들이 ‘벨 부등식 위배 (violation of Bell’s inequality)’라는 수학적 표현을 법률 용어로 번역한 것이다. 양자물리학에 나오는 비국소적 상관성을 뜻하는 얽힘 (entanglement)도 복잡성이라고 소개돼 있었다. 얽힘을 뜻하는 프랑스 용어(intrication)가 우리말로는 복잡성과 얽힘 등 완전히 다른 말로 번역되는데 잘못된 용어 선택을 한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는 양쪽이 얽혀 있을 때, 어느 한쪽도 상태가 정해져 있지 않고 측정 결과를 예측할 수도 없다. 그런데, 한쪽을 측정하면 ‘그 즉시’ 다른 쪽의 상태도 상관성이 있도록 결정된다는 것이 양자물리학의 주장이다. 양자암호와 양자텔레포테이션 발명자 중 한 사람인 IBM의 찰스 베넷 박사는 대학시절 히피족의 모토로 양자얽힘을 표현한다. “내 마음 나도 몰라, 네 마음 너도 몰라. 그렇지만 우리 마음 우리가 알고 있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쪽에서 벌어진 일이 다른 쪽과 연관이 된다면 빛보다 빨리 정보가 전달되는 것일까? 이는 특수상대성 이론과 모순되는 것이 아닐까?
박사학위 과정 중이던 아스페는 벨이 제안한 사고실험을 실제 실험으로 해냈다. 양자물리학의 측정은 확률론적이고, 숨은 변수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얽힘 양쪽의 측정 결과는 상관성은 즉시 이뤄지지만, 인과성은 없다는 말이다. 인과성이 없으니 양자얽힘을 이용해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어떤 정보도 보낼 수 없고, 특수상대성 이론과도 모순되지 않는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양자얽힘을 이용하면 빛보다 빠른 통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닉 허버트의 제안이 유수 학술지에 발표된 일이 있었다. 논문의 심사위원은 후일 양자텔레포테이션 발명자 중 한 사람인 페레스 박사였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 이론에 모순되는 이 주장이 틀렸음을 알면서도 게재하도록 허락했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 제안이나 허버트의 틀린 논문은 수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현재 진행 중인 양자정보과학의 발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잘못된 주장도 진지한 과정을 거쳐 좋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사고실험으로 탄생한 양자얽힘은 양자텔레포테이션, 양자암호, 양자계측 등 다양한 양자 기술의 모태가 되고 있다.
김재완 < 고등과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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