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하반기부터 서울 아파트 전셋값이 가파르게 오른 가운데 강남권에서 보증금이 10억원이 넘는 공공임대주택이 나왔다. 이 전셋집들은 일반적인 무주택 장기전세주택 수요자에겐 ‘그림의 떡’이나 마찬가지라는 평가가 나온다.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는 지난달 말 장기전세주택 모집 공고를 냈다. 장기전세주택은 2007년 당시 오세훈 서울시장이 도입한 공공임대주택 사업으로 지난해까지 3만3000가구가 공급됐다. 서울시는 전세시장 안정을 위해 2026년까지 기존 공급 물량보다 두 배가량 많은 7만 가구를 내놓을 예정이다. 서울시는 오는 15일부터 583가구를 공급하는 등 단계적으로 1900가구의 입주자를 찾는다.
‘시프트’로도 불리는 장기전세주택은 주변 전세 보증금 시세보다 20% 이상 저렴하게 최장 20년간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주택이다. 서울 전역에서 전셋값이 급등하는 상황에서 강동, 동작 등의 새 아파트와 강남,서초, 송파 등 강남권 재공급 단지에 시세보다 최대 40% 싸게 입주할 수 있어 관심이 쏠리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전셋값이 크게 오르면서 장기전세주택 보증금도 급격히 올랐다. 서초구에선 래미안퍼스티지 전용 84㎡ 5가구를 모집하는데 전세금은 10억10만원에 달한다. 같은 면적의 일반 전세 시세(17억~19억원)와 비교하면 40%가량 낮은 수준이지만, 어지간한 서울 외곽의 동일한 면적 아파트보다 비싸다.
같은 단지 소형 면적인 전용 59㎡도 17가구를 모집한다. 보증금이 8억3785만원이다. 해당 면적대의 전세 시세는 13억~14억5000만원 선과 비교하면 낮지만, 절대값으로는 높은 수준이다. 아크로리버파크반포도 같은 면적대 25가구를 전세금 8억3785만원 선에서 모집한다. 반포동 인근 U공인 대표는 “아크로리버파크 전용 59㎡ 호가는 최근 16억원을 넘어섰다”며 “사실상 시세보다 8억원 가까이 저렴한 '반값 전세'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다만 부동산 시장에선 “입주자격 요건을 맞추려면 소득은 적지만 현금은 많아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전용 60㎡ 이하 장기전세주택에 입주하려면 가구 소득이 ‘도시근로자 월평균’ 소득의 100% 이내여야 한다. 가구별 소득 기준(세전금액)은 △1인 가구 299만1631원 이하 △2인 가구 456만2535원 이하 △3인 가구 624만520원 이하 △4인 가구 709만4205원 이하 등이다. 여기에 부동산은 가구 구성원 전원이 소유한 토지(개별공시지가), 건축물(공시가격) 등 합산액이 2억1550만원 이하여야 한다. 소유 자동차 차량가액이 3496만원 이하인 조건도 달려 있다.
이같은 조건을 충족하면서 10억원 가까운 강남 일대 장기전세 보증금을 낼 수 있는 전세 수요자는 찾기 힘들다. 소득은 낮으면서 현금을 많이 보유한 이들에게만 유리한 제도인 것이다. 신혼부부인 박모 씨(34·여)는 “장기전세주택은 자금이 별로 없는 직장인들에게 절실한 제도지만 혜택이 돌아오지 않는다”며 “소득이 적은데 10억원씩 현금을 보유한 이는 사실상 부모로부터 큰 돈을 증여받은 현금부자 밖에 없지 않겠냐”라고 비판했다.
부동산 관련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웬만한 맞벌이 부부들은 소득기준에서 떨어진다”, “장기전세주택 소득기준을 충족하는 사람 중 보증금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 등의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장기전세주택 공급 면적이나 소득기준 조정 등 제도 손질이 필요하다고 지적이 나온다. 한 부동산 업계 전문가는 “강남권을 중심으로 공공임대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 애초 서민 주거안정이라는 정책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졌다”며 “서민 주거안정이나 전세시장 안정 효과는 미미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에 따라 공급면적을 전용 60㎡ 이하로 줄여 공급가를 낮추거나 소득기준이 현실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앞서 서울시는 소득기준이 현실과 괴리됐다는 지적이 있자 지난 2018년 한시적으로 전용 60㎡ 이하 공급분에 한해 소득기준을 도시근로자 가구당 월평균 소득의 150% 이내로 적용한 바 있다.
안혜원 한경닷컴 기자 anh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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