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달 말 내놓은 내년도 예산안을 보면 섬뜩합니다. 막장 정치인과 영혼없는 관료가 만나면 이런 예산안까지 나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604조4000억원 짜리 '초슈퍼 예산'을 짜면서 빚(적자국채)을 77조원이나 내기로 했고 그래서 국가채무가 처음으로 1000조원을 돌파하게 됐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국내총생산(GDP)대비 채무비율과 조세부담률이 각각 50.2%, 20.7%까지 오르게 됐다는 걱정도 아닙니다. 나라가 빚더미 위에 오르게 됐다고 비판할 수도 있지만 코로나 위기때문에 재정이 더 적극 나서는 구나 생각할 여지도 있습니다.
그러나 각론으로 들어가서 보면 얘기가 다릅니다. 선거 때문에 예산이 엉망진창이 된 것을 금새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거용 현금성 퍼주기 예산을 쏟아 부으면서 국민들의 안위와 직결되는 국방과 백신 개발 예산을 줄인 것부터 그렇습니다.
내년 예산중 가장 비중이 큰 것은 보건·복지 및 일자리 예산(36%)입니다. 217조원으로 올해보다 8.6% 증액됐습니다. 여기엔 현금 지원, 세금 알바, 학자금 지원 등 표심성 예산이 총망라돼 있습니다. 이중 청년 예산 증액이 두드러집니다. 올해보다 16% 늘어난 23조원이 배정됐습니다. 매달 20만원씩 월세를 주거나, 저축액의 3배를 정부가 얹어주는 등 현금 지원 예산이 많습니다. 일자리 사업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31조3000억원이 투입됩니다. '세금 용돈' 프로그램으로 불리는 노인 일자리 예산은 3조3000억원으로 2000억원 증액입니다. 전국민 고용보험, 기초생활급여 확대 등으로 다른 복지 예산도 줄줄이 인상됩니다. "정권 재창출 여부를 기준으로 판단하겠다"는 집권 여당 대표의 말이 예산에도 그대로 녹아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늘린 퍼주기 예산 만큼 어디선가는 삭감을 해야 합니다. 국방예산, 정확히는 방위력개선비(국방예산중 방위력 개선비를 제외한 나머지는 인건비, 급식비, 군수지원등 전력운영비임)가 깎였습니다. 16조6000억원로 2.3%(3964억원) 삭감됐습니다. 외환위기때도 증액한 게 방위력개선비입니다. 유례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예산이 2%(3401억원) 증액됐다고 발표했습니다. 그간 전력운영비로 취급하던 성능개량 창정비(3177억원)등 몇개 항목을 방위력개선비로 바꾼 것입니다. 명백한 '분식행위' 입니다. 정부도 국방비 삭감은 비판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간이라면 경영책임자가 옷을 벗어야 하는 일입니다.
'방역 안보' 예산으로 불리는 국산 백신(치료제 포함)개발 지원 예산도 61%나 깎였습니다.내년 예산은 893억원입니다. 올해 예산은 본예산(1314억원)과 추경(980억원)을 합해 총 2294억원입니다. 내년엔 많은 백신 개발업체들이 자금이 집중 투입되는 임상 3상에 진입합니다. 그런데도 예산은 거꾸로입니다. 실제 집행 실적도 형편없습니다. 올해 예산중 집행된 액수(지난 3일 기준)는 330억원(14%)에 불과합니다. 지원할 곳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관료 사회의 복잡다단한 의사결정 구조에다 비전문성, 특혜 시비에 휘말릴 가능성에 대비한 몸사리기 등이 겹쳐 여전히 지원이 더딥니다. "백신 주권이 중요하다" "끝까지 지원하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여전히 공허한 메아리입니다. 참고로 정부는 내년도 해외백신 구매사업에 2조6000억원(9000만회분)를 배정해 놓고 있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선거를 앞두고 지역민원사업 등이 반영되는 SOC사업에 역대 최대 예산(27조5000억원)이 배정되는 등 내년도 예산은 곳곳이 문제 투성이 입니다. 아직 국회 심사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예산안이 나올 수 있도록 꼼꼼한 심사와 조정이 있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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