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깃털보다 가벼운 공직자 처신

입력 2021-09-13 17:27   수정 2021-09-14 00:12

정보나 경호의 세계에서 노출은 금기다. 정체를 숨긴 ‘블랙’이든 신분이 공개된 ‘화이트’든, 비밀 유지가 철칙이다. 이를 어기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된다.

이른바 ‘고발 사주’ 사건에서 드러난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행적이 이런 상식과 너무 판이해 놀랍다. 정보수장의 동선이 SNS에 고스란히 노출된 점은 이해하기 힘들다. 박 원장은 고발사주 의혹 제보자 조성은 씨의 SNS에 얼굴과 실명이 드러난 본인 계정으로 댓글까지 달았다. 서울 도심 호텔에서 사적으로 만나 식사하고 조씨는 그 식당 내부를 자랑하듯 찍어올렸다. SNS만 봐도 국정원장의 동향이 웬만큼 파악될 정도다.

이는 그와 주변인들의 신변에 위험을 부르고, 결과적으로 국익을 해칠 위험이 커질 수밖에 없다. 2007년 아프가니스탄에서 납치된 한국인 인질을 구한 뒤 구출 요원에게 선글라스를 씌우고 같이 사진을 찍어 공개한 김만복 전 국정원장에 못지않은 부적절한 처신이다.

해외 정보기관들은 정반대다. 1948년 출범한 이스라엘 모사드는 1979년 이전까지 일반인은 존재조차도 몰랐다. 영국의 국내 담당 MI5와 해외 담당 MI6도 1909년 창설 후 1989년 보안법 제정 전까지는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깃털처럼 가볍고 극도로 부적절한 공직자 처신은 국정원장만의 일도 아니다. 잡범 수준의 가짜 수산업자에게 특별검사, 부장검사, 경찰 총경이 줄줄이 속아 넘어갔다. 여당 국회의원은 국회의장을 ‘개의 자식’을 연상케 하는 ‘GSGG’란 이니셜로 조롱했다. 지탄이 커지자 ‘공공선(general good)’을 강조한 것이라며 ‘아무말 해명’을 내놓았다.

관료도 마찬가지다. 최소한의 직업적 의무나 봉사자로서의 소명감이 실종된 듯하다. 경제부총리부터 “국고가 비어간다”고 말한 지 하루 만에 “아직 튼튼하다”고 말을 뒤집었다. 한 경제부처 차관이 “후보 확정 전에 여러 경로로 넣어야 한다”며 “대선주자가 받아들일 공약을 발굴하라”고 회의석상에서 지시한 것도 공직사회 무기력의 방증이다.

공직을 출세나 생계 수단 정도로 여기는 ‘한 번도 경험 못 한’ 이상한 풍조가 나라에 팽배해 있다. 어쩌면 “공직은 허허로움과의 싸움”(이헌재 전 부총리)이다.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나라와 국민을 위해 일한다는 긍지로 버터야 하는 게 숙명이다. 그런 숙명이 싫다면 공직을 내려놓아야 한다. 안 그러면 국민의 삶이 허허로워진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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