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은 환경문제지만 정책결정 과정은 기본적으로 국제정치여서 세계 각국은 철저히 자국의 이해관계에 기초해 정책을 세운다. EU가 최근 ‘탄소 국경세 도입’을 밀어붙이는 데는 설비 교체 시기를 맞은 역내 산업 여건에 대한 고려가 들어가 있다. 온실가스 감축 목표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2005년, EU는 1990년이 기준연도지만, 한국은 2018년이다. 미국처럼 2005년 기준이면 한국은 감축이 필요없고, EU처럼 1990년 기준이면 배출량을 늘려도 된다는 견해까지 나오는 배경이다.
무리한 탄소중립 정책은 ‘친환경’이라는 이미지 정치에 휘둘리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지난달 말 강행처리한 ‘탄소중립 기본법’에서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2018년 대비 35% 이상 감축’으로 못 박았다. ‘2017년 대비 24.4%’로 정한 지 2년도 안 돼 의견수렴도 없이 멋대로 뜯어고친 것이다. 대통령은 졸속 통과된 이 법을 지난 14일 공포하면서 “탄소중립과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최대한 의욕적으로 세우라”고 지시했다. 어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주재로 열린 ‘에너지와 기후에 관한 주요경제국포럼(MEF)’ 화상회의에선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 의지까지 밝혔다. 지난달 탄소중립위원회가 발표한 ‘탄소중립 2050 시나리오 초안’부터 현실성을 결여하고 있다. 지난 4년여간의 맹목적 탈원전·탈석탄에 무너진 에너지 현실에 대한 고민이 안 보인다.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탄소중립을 위해 원전기술이 필수”라고 했건만, 그에 대한 성찰도 실종이다. 아직 가능성에 불과한 수소에너지 신기술과 경제성이 취약한 재생에너지 중심의 비현실적 구상만 늘어놨다.
탄소중립 방안도 ‘지속가능한 성장’이라는 대전제로 수렴해야 한다. 장밋빛 비전만 앞세우다가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제철·정유·화학·조선·자동차·반도체산업이 무너질 수도 있다. 임기가 반년 남짓 남은 정부가 올림픽 메달 경쟁하듯 하기에는 너무 중차대한 이슈다. 차분하게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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