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 추석 보름달과 관련된 아주 오래된 기억이 하나 있다. 추석날 저녁에 고향 집 마당에서 할머니가 여러 음식을 한상 차려두고, 뜨는 달을 보며 절을 했다. 그런데 50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할머니의 옆모습과 밝은 보름달이 뜨는 상황이 이상하게 생생하다. 천문학을 배우고 그 기억을 돌이켜보면서 고향 집 마당에서 본 보름달이 어디로, 어떤 모습으로 떴을까 의아했다. 고향 마을 동쪽엔 1000m가 넘는 여러 산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월출이라면 보통은 보는 사람의 눈높이에서 떠올라 대기 영향으로 붉게 보이고, 해가 지고 약간 어두울 때 뜨는 붉은 보름달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만든다. 하지만 1000m 넘는 높은 산 위로 뜨는 달도 월출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도를 펼쳐서 거리를 측정해 보니 고향 집에서 높은 산까지 직선거리가 6.5㎞가량 됐다. 산의 높이가 1㎞가량이니 산 위로 달이 뜨면 고도가 대략 14도 정도 되는 셈이다. 고향 집도 고도가 조금 있고, 더 낮은 능선 사이로 떠올랐으면 14도보다는 다소 낮을 것이다. 아무 생각 없이 본 보름달이었지만 높이 1000m가 넘는 산 위로 해가 지고 나서 40분에서 1시간은 기다려서 보았을 것이다. 이런 계산을 하니 어릴 적 기억의 감흥이 많이 줄어든다. 어릴 적 기억이 엉터리는 아니지만, 그냥 기억은 기억으로 남겨두는 게 더 좋을 것 같다.
지구 반대편, 칠레의 천문대에서 본 안데스산맥 위로 뜨는 보름달 모습은 고향의 보름달과 많이 닮았다. 2200m 고도의 천문대에서 5000m가 넘는 산맥 위로 뜨는 달은 월출 시각을 넘겨야 볼 수 있어서 다소 어두워진 주변 풍경과 어우러져 마치 데굴데굴 굴러갈 것 같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이제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잘 안다. 수천억 개의 많은 은하계 중 하나인 우리 은하계의 한쪽 귀퉁이에 있는 수천억 개의 별 중 하나인 태양이 있고, 태양에 속한 여러 행성 중 하나다. 그런데 우리는 각자가 그런 지구에 사는 70억의 인류 중 한 명이다. 보름달이 뜬 밤은 밤새 하늘이 밝아서 다른 별을 보기는 몹시 어렵다. 그러니 추석엔 그냥 보름달이나 보며 인간이라는 존재와 자신을 돌이켜보는 게 어떨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한없이 겸손해진다.
전영범 < 한국천문연구원 책임연구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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