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부 장관이 중국과 전면적 갈등 중인 미국에서 이런 얘기를 했다는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그는 “한국은 미·중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가 없다”며 ‘반중(反中)블록’을 “냉전시대 사고방식”이라고도 했다. 북한의 핵 포기 여부 질문에는 “대북 보상을 제안하는 데 소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지금의 한국을 있게 한, 혈맹의 면전에서 중국과 북한을 치켜세운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배은망덕’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고도 남을 상황이다. 하긴 문재인 정부의 그간 대중·대북 노선에 비춰 보면 정 장관 발언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문제는 이런 ‘궤도 이탈’이 외교뿐 아니라 경제와 산업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한·미 양국은 반도체 협력과 관련해 매우 중차대한 시점에 와 있다. 원활한 협조가 되면 양국과 관련 업계 모두 ‘윈윈’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반도체산업 주도권을 중국에 넘겨줄 수도 있다.
미 백악관이 23일(현지시간) 올 들어 세 번째 반도체회의를 소집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삼성전자, 인텔, TSMC, 제너럴모터스(GM), BMW 등 굴지의 반도체·자동차업체들이 망라된 이번 회의는 유례없는 반도체 부족 사태에 대응하고 미국 내 반도체 인프라 구축을 위한 것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회의에서 “중국과 다른 나라들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며 반도체 인프라 구축의 시급성을 강조한 바 있다.
삼성전자는 이와 관련해 지난 5월 문 대통령 방미 때 17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에 반도체 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업계에서는 조만간 구체적 입지 등이 포함된 대규모 파운드리 투자 계획이 발표될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는 또 세계 최대 파운드리업체 TSMC를 제치고 테슬라의 차세대 자율주행칩 위탁생산을 사실상 수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업계에서는 정 장관의 이번 발언이 행여나 이런 빅이벤트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우려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외교와 경제는 불가분의 관계다. 정 장관은 자신의 편향된 시각이 국가 경제와 산업에 독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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