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이후 일본 경제는 ‘복합 불황’에 빠졌다. 수많은 경기침체 요인이 얽히고설켰기 때문이다. 가장 큰 요인은 ‘안전통화 저주(curse under safe haven)’다. 안전통화 저주는 배리 아이컨그린 미국 UC버클리 교수가 처음 주장한 것으로, 경기침체 속에 엔화가 약세가 아니라 오히려 강세가 돼 가뜩이나 어려운 일본 경제를 더 어렵게 만든 현상을 말한다.
1980년대 도요타 자동차와 소니 전자로 상징되는 제조업 전성시대 이후 일본 경제의 최대 현안은 ‘당면한 디플레이션 국면을 언제 탈피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일본의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이 1980년대 연평균 4.7%에서 1990년대 이후 1.2%로 급락한 것은 주로 내수 부진에 기인한 만큼 디플레이션도 이 요인이 가장 큰 것으로 지적됐다.
총수요 항목별 GDP 증가율 기여도를 보면 수출은 1970년대 이후 0.5∼0.8%포인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데 비해 내수 기여도는 1970년대 3.8%포인트, 1980년대 4.0%포인트에서 1991∼2011년에는 0.5%포인트로 급락했다. 이 때문에 GDP에서 내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89.6%에서 2011년 80% 밑으로 떨어져 ‘잃어버린 20년’이란 구조적인 문제를 낳았다.
거듭된 정책 실수도 침체 기간을 연장하는 요인으로 가세했다. 1990년 이후 무려 25차례가 넘는 경기부양책은 재정 여건만 악화시켰다. 기준금리도 ‘마이너스 수준’으로 대폭 인하했으나 경기 회복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각종 미명하에 구조조정 정책을 20년 넘게 외쳤으나 효과를 보기는커녕 국민들의 불신만 키워 급기야는 모든 정책이 무력화돼 죽은 시체와 같은 ‘좀비 경제’ 국면으로 추락했다.
일본 경제가 내수 부문의 활력을 되찾아 디플레이션 국면에서 탈피하기란 쉽지 않다. 내수 부진이 고용과 임금 불안정성 증대, 인구 고령화 진전 등 당장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인 요인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정부의 재정 여건도 크게 악화돼 1990년대처럼 정부가 민간수요를 적극적으로 대체해 촉진할 수 있는 임계점을 넘은 지 오래됐다.
내수가 회복되지 않은 상황에서 일본 경제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경제 여건 이상으로 강세를 보이는 엔화 가치가 약세로 돌아서야 가능하다. 집권당인 자민당은 일본 경제가 1990년 이후 장기간 침체된 가장 큰 요인으로 일본은행 총재였던 미에노 야스시가 고집스럽게 물가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는 비타협적 통화정책을 펼친 것을 꼽았다.
2012년 12월 아베가 자민당 총리로 재집권하자마자 엔저 정책을 통한 성장을 지향하는 구로다 하루히코 현 일본은행 총재를 전격적으로 영입한 것도 이 때문이다. ‘경기 상황과 통화 가치가 따로 노는 악순환 국면을 차단하는 것이 일본 경기를 회복시키는 최후 방안’이라는 하마다 고이치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의 권고를 받아들여 ‘아베노믹스’를 추진했다.
각국의 반발도 지속됐다. 초기에는 브릭스(BRICs)에 이어 독일 등 선진국과도 갈등이 심했다. 독일은 일본이 엔저 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무역보복 조치를 불사하겠다는 입장을 내놨다. 묵시적으로 엔저를 용인해온 미국도 2018년 하반기 환율 보고서 발표 때부터 더 이상의 엔저 조작은 어렵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일본 내부 여론도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타격을 받은 곳은 엔저로 채산성이 지속적으로 악화된 내수업체다. 일본 국민도 수입물가 급등으로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경제 고통이 커졌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전체 에너지원에서 수입 에너지원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가장 반겨야 할 수출업체의 불만이 누그러지지 않는 점도 주목된다. 장기간 지속된 엔고에 대응하기 위해 수출업체들이 해외로 진출해 이제는 ‘기업 내 무역’이 보편화됐다. 수출결제통화도 한때 80%를 웃돌던 달러 비중을 40% 내외로 낮춰놔 엔저 상황에서도 채산성 개선보다 통상 환경만 악화됐기 때문이다.
아베노믹스가 멈추면 곧바로 ‘위기’에 봉착할 것이라는 시각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이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내수부터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엔저 정책은 내수산업을 더 어렵게 한다. 이 상황에서 수출마저 안 되면 일본 경제는 걷잡을 수 없는 국면으로 빠져들 수밖에 없다. 차기 일본 정부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
지난 10년 동안 아베노믹스는 많은 부작용을 안고 있었으나 자국 내에서는 견제할 세력이 없었다. 국제적으로도 이기주의 기승으로 ‘플라자 합의’와 같은 대타협이 없었다. 극약처방인 아베노믹스가 햇수로 10년 동안 지속돼온 배경이다. 결과는 일본 경제를 후진국으로 전락시켰다는 자기반성이 나오고 있다.
공생적 게임이론으로 주변·경쟁국과 윈윈?
2012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로이드 섀플리 미국 UCLA 명예교수는 특별한 방법론적 설계가 어떻게 시장에서 참가자 모두에게 시스템적으로 혜택을 줄 수 있는지를 설명해 냈다. 동 이론을 토대로 앨빈 로스 하버드 비즈니스스쿨 교수는 안정성이 어떻게 특정 시장 제도의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가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것으로 유명하다.
두 교수가 연구한 ‘안정적 할당과 시장 설계에 대한 실증적 연구이론’의 공생적 게임 이론을 바탕으로 아베노믹스를 장기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라 안팎으로 외면당하고 있는 일본 경제를 참가자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방향으로 해결해 낼 수 있는 양식(architecture), 즉 새로운 정책을 모색해야 한다.
환율이란 매개변수로 경쟁국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정책이 추진 세력과 관계없이 지속될 수 있으려면 ‘공생적’이어야 한다. 하지만 대표적인 근린궁핍화 정책인 아베노믹스는 추진 초기부터 가장 우려된 점이 ‘갈라파고스 함정(로빈슨 크루소 함정이라고도 부른다)’이었다.
차기 일본 정부가 인접국과 경쟁국에 공생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는 내수 확대책을 어렵더라도 추진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국가채무 누적으로 재정지출에 한계가 있다면 일본 국민에게 ‘저축이 미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부(負)의 저축 준조세’ 등을 통해 내수 진작책을 모색해야 한다.
아베노믹스 종료 이후 원·달러 환율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작년 8월 말 아베 총리 사임 이후 국제 환투기 세력이 ‘왜 엔화 약세가 아니라 강세에 베팅해 왔는가’를 곰곰이 따져볼 필요가 있다. 경제 실상을 반영한다는 차원에서 보면 주가가 떨어지면 해당국 통화 가치는 약세가 돼야 한다.
하지만 아베노믹스를 더 이상 추진하지 못하면 일본 경제는 ‘엔고의 저주’가 재연될 가능성이 높아 국제 환투기 세력이 이 점을 노린 것이다. 안전통화 여부는 최종 대부자 역할을 누가 맡느냐에 달려 있다. 일본은 엔화표시 국채 96%를 갖고 있는 자국 국민이 최종 대부자 역할을 떠안고 있어 국가 부도 위험이 희박하다.
코로나 사태 직후 원·달러 환율이 1300원 이상 급등할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올초 1082원으로 급락했다. 조 바이든 미 정부 들어 짓눌렸던 약달러 요인이 풀리면서 1180원 내외로 반등하고 있으나, 차기 일본 정부가 새로운 정책을 모색하지 못하고 아베노믹스가 종료되면 엔고 현상이 재연돼 원·달러 환율을 하락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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