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정책통으로 알려진 스티븐 글릭먼 애스피레이션 글로벌 대표는 지난달 29일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열린 대한민국 ESG포럼 강연에서 이같이 말했다. 그는 강연에서 “미국에서는 원전을 탄소 배출을 줄일 방안으로 보는가”라는 한 참석자의 질문에 “민주당 진보 성향 의원은 물론 미 정부도 원전이 탄소를 줄일 수 있다고 보편적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자력을 석탄·석유 발전과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글릭먼 대표는 2008년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백악관 선임경제보좌관을 지낸 정책전문가로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의 연구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 그가 지난 1월부터 몸담은 애스피레이션은 사용자 500만 명의 인터넷전문은행으로 수익 일부를 조림사업에 쓰는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으로 잘 알려진 챌린저뱅크다.
챌린저뱅크란 모바일·디지털 기술을 기반으로 금융 혁신에 방점을 둔 은행이다. 은행 이름인 애스피레이션은 ‘열망’ ‘포부’ 등을 뜻하는 단어로 ESG 경영에 대한 의지를 나타낸다는 설명이다. 2015년 설립된 애스피레이션은 올랜도 블룸 등 환경운동으로 유명한 할리우드 배우와 이베이 설립자 피에르 오미디아가 세운 임팩트 투자사 오미다르네트워크의 투자를 받기도 했다.
글릭먼 대표는 “미국 정부는 원전 의존도를 줄일 계획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미국도 (한국처럼) 석탄과 석유에 의존하는 산업이 청정에너지원으로 전환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다”며 “미 의회에서 논의 중인 3조5000억달러 규모의 인프라 법안도 이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미 정부는 현재 38% 수준인 청정에너지 발전 비중을 2035년까지 100%로 끌어올린다는 계획이다. 청정에너지에는 태양광과 수력·풍력 등 신재생에너지뿐 아니라 원자력 발전도 포함돼 있다.
글릭먼 대표는 “미국 민주당과 유럽연합(EU)이 추진 중인 탄소국경세는 인류 역사에서 가장 큰 에너지 전환을 촉발할 것”이라며 “한국 산업계도 준비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탄소국경세란 역내에서 생산된 제품보다 탄소 배출량이 더 많은 수입품에 부과하는 관세로 미국과 EU는 각각 2024년과 2026년부터 이 제도를 전면 도입한다는 계획이다.
글릭먼 대표는 “현재 t당 25달러 안팎인 탄소배출권이 2030년이면 250달러까지 치솟을 수 있다”고 예상했다. 그는 “각국의 탄소 감축 목표가 강화될수록 탄소배출권 공급이 줄기 때문에 가격은 뛸 수밖에 없다”며 “철강 등 화력에너지에 의존하는 한국의 대형 수출산업은 탄소 저감 목표를 맞추기 위해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이끄는 애스피레이션은 조림사업에서 한국 기업과 제휴를 추진한다는 계획이다. 글릭먼 대표는 “애스피레이션이 지금까지 기업 및 개인 고객과 약정을 맺고 미국과 남미 등지에 심은 나무는 3500만 그루에 달한다”고 소개했다. 이는 기업의 ESG 경영 수준을 높일 뿐 아니라 재무적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 애스피레이션의 협력사가 돼 세계에 심은 나무 숫자만큼 탄소배출량을 줄인다면 각종 온실가스 배출 관련 부담금을 덜 수 있다는 의미다.
그는 “애스피레이션이 싼 가격에 사 놓은 묘목을 구매해 탄소배출량 저감에 활용하면 추후 탄소배출권을 사들이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라며 “20여 년간 올라갈 탄소배출권의 비용을 저렴한 묘목 구매 비용으로 상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국내 금융사와 협력해 조림사업에 기부하는 금융상품을 출시할 계획도 소개했다. 글릭먼 대표는 “한·미 관계에서 기후 변화가 핵심 의제로 떠오를 것”이라며 “애스피레이션도 한국이 탄소중립을 가속화하는 데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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