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Y(소비자 스스로 제작하는) 화장품’을 개인 홈페이지와 대형 온라인쇼핑몰을 통해 판매하는 A씨는 최근 제조 관련 기술신용평가(TCB)를 통해 총 1억원을 은행에서 빌릴 수 있었다. 은행의 기업영업 담당 직원은 급여이체 시 금리를 0.2%포인트 깎아주겠다고 추가 제안을 했고, 대출 과정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A씨는 높은 줄로만 알았던 은행 문턱이 갑작스레 낮아진 이유가 궁금했다. 심지어 같은 은행 개인신용대출에 대해선 ‘일부 상환요구’까지 받았는데 개인사업자 대출은 이에 비해 ‘무풍지대’나 다름없었다.
A씨와 같은 개인사업자들 사이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 은행 돈 빌리기 좋아졌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중소기업·개인사업자 금융에 비대면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심사 프로세스가 크게 빨라졌고, 당초 거래가 없던 은행으로부터 ‘대출 역제안’을 받기도 한다.
은행들이 이처럼 중소기업, 자영업자 대출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역설적으로 대출 자산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가계대출 신규 영업이 거의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금융당국이 강력한 가계대출 총량 규제를 펴면서 자금 운용에 발목이 잡힌 은행들이 기업금융 영업을 활발히 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로 피해를 본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지원하기 위한 정부의 ‘대출원금 및 이자상환 유예’ 조치가 지난달 말 6개월 추가 연장된 반면 가계대출은 강하게 억제하려는 정부 규제가 이 같은 현상을 만들어냈다는 분석이다. 한 은행의 고위 관계자는 “최근 가계대출 규제에 회사채도 공급에 비해 수요가 많다 보니 기업대출에 목맬 수밖에 없는 처지”라고 말했다.
시중은행의 기업금융 담당자(RM) 간의 고객 유치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타깃은 플랫폼, 전기차 벤더 등의 유망업종 중소기업이다. 자금이 필요하면서도 상환 가능성이 높은 우량 기업을 확보하기 위해 지점장 권한이던 각종 금리할인 우대 재량을 영업담당자에게 주거나 대출 심사 과정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다. 한 은행 강남지점 RM센터장은 “신성장 산업으로 꼽히는 디지털 플랫폼 기업과 밴처캐피털(VC) 투자를 받은 중소기업, 외감법(외부감사에 관한 법률) 적용을 받는 우량 기업을 발굴하는 게 최우선 목표”라며 “유망 업종이 몰려 있는 경기 성남 판교나 강남 등에선 기업금융 영업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국제 자본관리규약인 바젤Ⅲ를 조기 도입한 국민, 신한, 우리, 농협은행 등에서 연말까지 전체 대출 중 기업대출 비중을 51~57%로 맞춰야 하는 만큼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많은 연말을 앞두고 이들 은행 간 대출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이란 관측이다.
‘기업대출 쏠림’ 현상이 은행의 자금 배분 기능을 왜곡할 것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다. 대기업보다 중소기업으로, 중소기업 대출 중에선 자영업자가 상당수 포함된 개인사업자(소호 대출) 대출로 자금이 몰리고 있는 데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유망한 산업군과 사업체를 발굴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한 은행의 부행장은 “이자 상환유예 조치가 계속 연장되면서 겉으로 드러나는 은행의 건전성은 역대 최고로 좋은 수준이지만 이대로 대출이 나가도 되는지 우려될 때가 많다”고 털어놨다. 상반기 기준 국내 은행들의 부실채권 비율은 0.54%로 지난해 상반기(0.71%) 보다 크게 낮아졌다.
은행의 또 다른 기능인 기업, 산업에 대한 부실 평가도 유예된 상황이다. 한국금융연구원에 따르면 2005년부터 2017년까지 국내 은행의 기업대출 증가율과 명목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비슷하게 움직였다. 2018년부터는 대출 증가율에 비해 GDP 증가율이 낮아지면서 괴리가 커졌고, 지난해의 경우 GDP 증가율은 0.4%, 기업대출 증가율은 12.6%에 달했다. 김영도 한국금융연구원 은행·보험연구실장은 “경기 사이클이 개선되지 않았음에도 기업대출이 더욱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는 점이 문제”라며 “재무제표를 공시하는 2500여 개 기업 중 이자보상배율이 1 미만인 기업이 1000개에 달하고, 은행 신규 대출액의 30%가 한계 기업에 흘러드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김대훈/빈난새 기자 daepu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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