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 일간의 현대제철 당진제철소 불법점거 사태를 끝내기로 한 노·사·정 협상이 타결된 지난 13일 회사 관계자가 들려준 얘기다. 노사 대화를 통해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설명이었다.
과연 그럴까. 이번 사태는 현대제철이 협력업체 직원을 자회사 채용 형태로 정규직화하기로 하면서 촉발됐다. 현대제철은 올 4월 고용노동부의 ‘비정규직 직접고용 시정지침’이 내려오자 석 달 만인 지난 7월 협력사 비정규직을 자회사 정규직으로 채용하겠다고 발표했다. 협력업체 직원을 고용할 현대ITC 등 자회사 세 곳도 설립하기로 했다. 경제계에선 파격적인 결단이라는 평가가 나왔다. 자회사를 통한 협력사 직원들의 정규직 전환은 대형 제조업체 중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측의 이 같은 행보는 시작도 하기 전에 반발에 부딪혔다. 당진공장 협력사 직원 5300여 명 중 절반인 2500명은 현대ITC 입사를 거부하고 ‘직고용’을 요구했다. 이 중 민주노총 산하 금속노조 조합원 100여 명은 지난 8월 23일부터 공장의 ‘두뇌’ 격인 통제센터를 불법점거한 채 농성을 벌여왔다.
점거 과정에서 직원을 폭행하는 등의 피해도 잇따랐다. 통제센터 직원 530명은 노조에 가로막혀 50여 일간 일터에 들어가지도 못했다. 법원이 지난달 퇴거 결정을 내렸지만 노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방역 지침도 어긴 채 대규모 집회를 강행했다. 일부 강성 노조원이 자회사에 입사한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비난을 일삼으면서 ‘노노 갈등’도 불거졌다.
사측과 노조는 이날 세부 합의사항은 공개하지 않았다. 본지 취재 결과 사측은 노조가 점거를 푸는 대신 금속노조 소속 조합원에 대해선 자회사 고용계획을 진행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으로 확인됐다. 협력사 전환 배치를 통한 고용보장도 약속했다. 예전처럼 협력업체 직원으로 고용하기로 한 것이다. 야심 차게 내세웠던 정규직화 계획이 사실상 원점으로 돌아갔다. 이번 사태의 발단인 정규직화를 둘러싼 노사 갈등이 언제든지 다시 불거질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경제계는 이번 사태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둘러싼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 향후 자동차, 조선, 철강 등 외주 비율이 높은 제조업에서 정규직화를 진행할 경우 불법점거농성 등의 똑같은 사태가 촉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제계 관계자는 “노조가 생산시설을 불법점거하면 사측이 손을 쓸 도리가 없다는 점이 이번 사태를 통해 확인됐다”고 지적했다. 50여 일간의 불법점거에도 경찰 등 공권력이 아예 손을 쓰지 못했다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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