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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5월 이탈리아 피렌체. 20대 중반의 동양인 청년은 두오모 성당 주변에 몰려 있는 명품 매장 앞을 떠나지 못했다. 난생처음 접한 럭셔리 핸드백이 평범한 한국 직장인 월급의 열 배가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었다. 수출용 중저가 핸드백 제조업체에 근무하던 그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충격에 빠졌다. 훗날 명품 핸드백 하나로 연 매출 1조원의 중견기업을 일군 박은관 시몬느 회장의 34년 ‘핸드백 인생’ 서막이 오르게 된 순간이다.
일에 푹 빠진 그는 초고속 승진을 이어갔다. 대리, 과장, 차장을 거쳐 30세에 수출부장을 달았다. 그가 수출을 전담하는 동안 청산은 20배 성장했다. 1986년 청산은 수출액 8000만달러 기록을 세우며 400여 개에 달하던 한국 가방 수출업체 중 1등 기업으로 발돋움했다. 인천에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그를 위해 회사가 운전기사 딸린 승용차와 전용 비서를 따로 내어줄 정도였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해외 출장에서 만난 바이어는 “이탈리아 고급 소재를 가져다가 한국 장인 손기술로 가공하면 2000~3000달러에 팔리는 럭셔리 명품 핸드백을 못 만들 것도 없다”며 독립을 제안했다. 그는 정흥덕 청산 사장에게 조언을 구했다. 정 사장은 창업을 흔쾌히 도우며 꼭 필요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내라고 했다. 박 회장은 부친에게 빌린 1억원을 자본으로 청산 생산관리부장 등 15명과 함께 1987년 창업에 나섰다. 시몬느의 시작이었다.
박 회장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피렌체 첫 출장의 기억을 떠올렸다. 중저가 핸드백 기획상품을 한다면 막차가 맞겠지만 초고가 명품 핸드백은 막차가 아니라 한국에선 첫차라고 확신했다. 1987년 6월 시몬느 개업식에서 박 회장은 이렇게 일갈했다.
“우리는 고급 핸드백을 해보려 합니다. 한국에서는 아무도 해본 역사가 없는 길입니다. 과거 봉제업은 시대의 바람을 타는 거대한 풍차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바람개비입니다. 바람이 불지 않으면 우리가 들고 뛰면 됩니다.”
박 회장은 패션의 중심 뉴욕으로 향했다. 알고 지내던 바이어들에게 가장 유명한 패션 브랜드를 꼽아달라고 했다. 그들이 지목한 건 ‘도나카렌뉴욕(DKNY)’. 박 회장은 뉴욕 중심가 백화점에서 DKNY 핸드백 6개를 샀다. 귀국 후 한국의 장인들과 DKNY 핸드백을 분해한 뒤 다시 이탈리아로 건너가 최고급 가죽을 구해 샘플 제작에 들어갔다. 박 회장은 완성된 제품을 들고 DKNY 본사를 찾았다. DKNY 수석디자이너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제품의 완성도는 물론 이탈리아 제품보다 30% 저렴한 가격, 빠른 납기일 등 메이드 인 이탈리아 제품에 비해 손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케팅 부서에서 태클이 들어왔다. DKNY 제품을 사는 고객들은 단순히 가격과 품질뿐만 아니라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는 가치에 지갑을 연다는 논리였다. 호텔 방으로 돌아온 박 회장은 이틀을 칩거하며 돌파구를 모색했다. 자신을 믿고 함께한 동료 장인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그는 전화기를 들었다. 다시 DKNY 임원을 만났다. “3대째 이어져 오는 80년 된 이탈리아 공방에도 처음에는 누군가 시작한 첫날이 있다. 우리는 왜 안 되나(Why not us)?”
설득에 넘어간 DKNY는 시몬느에 전체 물량의 1%인 240개 오더를 줬다. 완판이었다. 이듬해에는 600개, 다음해 2400개를 주문했다. 뉴욕에서 가장 뜨고 있던 DKNY가 생산 공장을 이탈리아에서 한국으로 옮겼다는 소식이 퍼졌다. 코치, 토리버치 등 경쟁사들에서도 주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오늘날 시몬느는 연간 2080만 개의 핸드백과 920만 개의 지갑을 제작한다. 글로벌 시장 점유율 10%, 미국 시장 점유율은 30%다. 20여 개 명품 브랜드가 고객사다.
시몬느 사옥은 이 밖에도 박 회장이 평생 수집한 650여 점의 미술품으로 가득 차 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의 작품을 비롯해 문성식, 노충현, 최수정, 유현경, 조환, 마리 킴 등 국내외 젊은 작가의 작품들로 가득하다. 300여 명의 시몬느 디자이너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박 회장에게 핸드백의 의미는 무엇일까. “여성들이 늘 들고 다니는 핸드백은 희로애락을 기록하는 분신과도 같습니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함께한 삶의 추억과 자취가 묻어 있는 소품이죠. 제게 핸드백은 원하던 인생을 마음껏 그리게 해준 캔버스와도 같습니다.”
시몬느는 아내를 부르는 애칭…다시 만난 날이 자사 브랜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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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을 앞두고 있던 무렵 박 회장은 오랜 시간 회사 이름을 놓고 고민했다. 법인 등기를 코앞에 두고 직원들은 이름을 빨리 정해야 한다고 재촉했다. 외국인 바이어들과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도 그는 회사 이름을 고민했다. 바이어들은 이구동성으로 “패션업을 계속 할 것이라면 부인을 부르는 애칭 ‘시몬느’ 이상 가는 이름은 없다”고 했다. 당시 한국은 영어식 기업명이 생소하던 시절. 시몬느란 이름은 그렇게 정해졌다.
현재 시몬느는 세계 1위 명품 핸드백 제조업자개발생산(ODM) 기업이 됐다.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직전인 2019년 매출은 1조178억원, 영업이익은 1351억원을 기록했다. 그동안 생산한 핸드백이 4억 개가 넘는다.
시몬느는 자사 브랜드 ‘0914’를 2015년 9월 출범시켰다. 전 세계에서 판매되는 핸드백의 10%를 만드는 상황에서 브랜드 파워를 가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0914도 부인과의 인연이 깊다. 박 회장이 한때 헤어졌던 아내와 재회한 날짜에서 이름을 땄다. 꿈에 나타난 아내를 그리며 함께 자주 가던 카페로 향한 이날 그는 소설처럼 아내와 재회했다.
진입장벽이 높은 명품 브랜드 시장에서 0914가 자리를 잡을 때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박 회장의 생각이다. 0914를 ‘넥스트 제너레이션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이유다. 박 회장은 “시몬느가 30년 넘게 핸드백 제조 분야에서 기틀을 닦았다면 다음 세대에서는 0914를 통해 한국의 패션 브랜드로 꽃을 피워주길 바라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 박은관 회장은
△1955년 인천 출생
△1974년 제물포고 졸업
△1979년 연세대 독어독문과 졸업
△1980년 주식회사 청산 입사
△1987년 주식회사 시몬느 설립
△1989년 수출 1000만불탑 및 대통령 표창 수상
△2000년 수출 1억불탑 수상
△2012년 한국형 히든챔피언 선정
△2014년 수출 5억불탑 및 철탑산업훈장 수상
김진원 기자 jin1@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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