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없는 눈으로…채울 수 없는 고독을 말하다

입력 2021-11-18 16:44   수정 2021-11-19 02:01

“재능 있는 작가는 차고 넘친다. 하지만 특별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작가, 그리고 그렇게 사물을 보는 방식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작가는 한 시대에 흔하지 않다.”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말이다. 20세기 이탈리아 출신 화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1884~1920)는 ‘특별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이를 예술적으로 표현한’ 대표적인 작가에 해당한다.


모딜리아니의 부인 잔 에뷔테른이 모델을 섰던 그의 1919년 작품 ‘잔 에뷔테른 초상’은 20세기의 가장 독창적이고 상징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모딜리아니 이전에는 누구도 이런 독특한 방식으로 인물을 초상화에 표현한 적이 없었다. 모딜리아니 화풍의 특별함은 어디에서 비롯된 걸까.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서 특별함의 비결을 추적해보자. 그림 속 여자는 흰색 속옷 차림으로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여자의 머리는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어졌고 왼손 검지로는 뺨을 만지는 자세를 취했다. 얼굴과 몸은 인체 비례를 무시한 왜곡된 형태로 표현됐다. 달걀형의 얼굴은 몸에 비해 유난히 작고 손과 팔, 코는 지나치게 길쭉하다. 또 눈, 코, 입은 윤곽선만을 사용해 간결하고도 단순하게 표현됐다. 놀랍게도 아몬드 모양의 비대칭 눈에는 눈동자가 없다. 기다랗고 평면적인 얼굴 형태와 비례가 맞지 않는 몸, 텅 빈 눈, 단순하면서도 대담한 윤곽선은 모딜리아니 화풍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의 화풍은 데포르마시옹(deformation)을 가장 창의적으로 활용한 대표적인 사례다. 데포르마시옹은 시각적 표현의 영역을 확장하거나 작가의 감정 표출을 위해 의도적으로 특정 부분을 강조하거나 왜곡해 변형시키는 미술기법을 말한다. 모딜리아니가 동시대 화가들과 차별화된 독창적 화풍을 창안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며, 어디에서 영감을 얻었을까.

1906년, 22세의 모딜리아니는 고국 이탈리아를 떠나 세계 미술의 중심지인 프랑스 파리로 이주한 이후 자신만의 회화 양식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가 파리에서 창작에 몰두하던 시절 화가 피카소, 조각가 브랑쿠시를 비롯한 전위적인 예술가들이 비서구권 나라의 미술에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특히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인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지역의 원시 조각과 부족 가면의 비사실적 표현성과 추상성이 강조된 조형 기법에 깊이 매료됐다.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원시인들이 대상을 실물과 닮게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데 큰 충격을 받았다.


인체를 실물과 똑같이 묘사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이유는 예술의 목적이 종교의 원초적 형태와 신화를 상징적으로 구현하거나, 초자연적인 세계와 교감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인간 내면의 감정과 정신세계를 기하학적 형태로 단순하게 표현한 원시미술은 서구 전통미술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미술 영역을 개척하던 예술가들에게 강한 영감을 줬다. 파리의 진보적 예술가들은 유럽 문명인들이 야만적이고 미개한 사회라고 배척한 원시인의 예술에서 혁신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파리 트로카데로민속박물관에 전시된 식민지 공예품들이 유럽인의 이국적 취향을 자극하는가 하면, 아프리카 원시 조각과 부족 가면이 매우 싼 가격에 매매돼 가난한 예술가들이 쉽게 구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도 원시주의 열풍이 불었던 또 다른 동기가 됐다.

모딜리아니는 새로운 표현 양식을 개발하기 위해 원시적 형태와 기법을 탐구한 대표적인 예술가였다. 그는 눈과 입이 없고 길쭉한 코만 조각된 구석기와 청동기 시대 두상 조각과 불균형적이며 형체가 왜곡된 아프리카 가면들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인물을 단순한 형태로 표현하면 더 강렬한 감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체를 비정상적으로 길쭉하게 늘어진 형태로 표현한 아이디어는 부드러운 여성성과 우아한 자태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중세 성모상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후기에 유행한 매너리즘 화풍에서 가져왔다.

오늘날 모딜리아니는 서구 전통미술의 조형 어법과 비서구권 원시주의의 표현성을 독창적으로 융합한 위대한 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프랑스 시인 장 콕토는 인간의 본질인 고요한 내면세계의 아름다움을 혁신적 화풍에 구현한 모딜리아니의 초상화를 이렇게 극찬했다. “인체의 곡선은 매우 가늘고 가벼워서 마치 영혼의 선처럼 느껴진다. 그 유려한 선들은 샴 고양이처럼 부드럽게 물결치면서 우아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이명옥 < 사비나미술관 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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