널리 알려진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많지만, 실제로 받아들여지는 사례는 많지 않다. 쿼티 키보드가 대표적이다. 1936년에 설계된 드보락 자판은 전체 키 중 70%가 자판의 중앙에 위치해 쿼티 자판보다 훨씬 수월하게 타이핑 할 수 있다. 드보락 자판의 우수함은 여러 차례 증명되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쿼티 자판을 사용한다. 비디오카세트도 마찬가지다. 베타맥스 방식이 VHS보다 설계가 뛰어나고 가성비가 좋다는 점은 많은 사람이 인식했었지만, 시장을 장악한 것은 VHS였다.
혁신 수용의 어려움
새로운 제품과 개념은 아무리 잘 포장되더라도 사회구성원이 가진 기존의 믿음과 사회 규범과 충돌할 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능이 우수하고, 가성비마저 좋은 제품이 시장에서 선택되지 못하는 경우도 이에 속한다. 대부분의 기업은 더 사용하기 쉽고, 더 눈길을 끌면서도 값싼 제품을 만들어내지만 실패는 계속된다. 시장은 더 우수한 제품보다 익숙한 제품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정책도 유사하다. 1960년대에 발생했던 인구변천 과정에서 등장한 산아제한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정책이었다. 당시의 한국 문화는 많은 자녀를 낳아 키워야 한다는 전통적인 믿음에 깊이 뿌리 박혀 있었던 탓이다. 높은 출산율은 사회적 지위와 개인의 성취를 보여주는 지표였다. 이런 상황에서 산아제한정책은 정착되기가 어려웠다. 물론 많은 자녀에 대한 전통적인 믿음은 선진국에도 존재했다. 차이점은 그들은 우리나라처럼 급격한 경제성장을 경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가족계획에 대한 생각을 발전시키기까지 몇 세대의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의학과 식량 생산이 점진적으로 발전하면서 문화적 변화도 점진적으로 도입되었고, 이에 따라 가정의 사회규범도 서서히 변해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여유가 없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식량 공급이 넉넉해져 유아 사망률이 급감했고, 이는 곧 인구과잉으로 이어질 것이 너무나 명확했다. 서양 국가들은 이런 종류의 급격한 전환을 경험한 적이 없기에 롤모델로 내세울 만한 국가도 없었다. 한국의 산아정책은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혁신 수용과 행동변화
하지만 놀랍게도 한국의 산아제한정책은 예정보다 일찍 목표를 달성했다. 20년 만에 피임방식이 전국으로 전파된 것이다. 한국의 성공적인 산아제한정책은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일이었다. 핵심은 사회규범에 있었다. 처음부터 모든 마을이 산아제한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어떤 마을은 전체 가정의 1.7%만 피임을 받아들였지만, 어떤 마을은 40%의 수용률을 보였다. 연구 결과 두 마을의 차이점은 구성원 간의 유대였다. 당시 한국인은 피임법에 대한 정보를 아주 가까운 친구나 이웃으로부터 얻었다. 정부가 전국 마을에 다양한 피임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지만, 실제 이를 받아들이기로 한 결정에 영향을 미친 것은 피임방법별 특성이 아니라 다른 사용자로부터 받은 사회적 승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지인이 채택한 피임법이 무엇이건 상관없이 당사자도 동일한 피임법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피임법을 먼저 받아들인 사람들이 친교와 조언을 위해 조직된 각 마을의 여성 단체들이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여성 단체 회원들이 특정 피임법을 받아들이면, 먼저 받아들인 집단으로부터 그 방법이 마을의 사회적 유대를 통해 다른 마을로 퍼져나갔다. 산아제한을 막았던 사회적 규범이 달라지자 산아제한이 급속도로 확산된 것이다. 반면 짐바브웨는 사회적 규범을 고려하지 않은 정책으로 에이즈 대유행을 멈추지 못했다. 2001년 당시 짐바브웨 국민 4명 중 1명이 HIV 양성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자들은 PrEP라는 기적의 약을 만들어냈다. 하루 한 알만 복용하면 HIV 전파를 근본적으로 차단할 수 있었다. 게다가 공짜였다. 하지만 아무도 약을 복용하지 않았다. 이들은 친구와 이웃이 자신의 약 복용 사실을 알면 HIV 감염자로 의심할까 두려웠다. 소문이 퍼지면 이를 잠재우기란 불가능에 가깝기에 이들은 약을 복용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혁신의 인식과 확신
혁신의 인식과 이를 채택하려는 확신은 분명 다르다. 인식과 달리 이를 채택하는 과정에서는 강한 저항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사람들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다수의 채택자로부터 사회적인 지지를 얻어야 한다. 그리고 그 지지는 소수의 강한 유대를 가진 사람들 간에 전파되면서 사회 전반으로 확산된다. 새로운 기술이 확산되고 사용되는 모습도 이와 같다. 그 가치가 명확하게 드러나기 전까지는 기술을 받아들이는 소수의 사람으로부터 시작해 점차 다수의 경험자가 발생하기 시작하면, 사회 전체가 해당 기술을 받아들이게 된다.
혁신적인 변화일수록 저항이 강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변화는 이러한 저항을 극복하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디지털 경제시대, 모두가 네트워크 효과를 통한 빠른 확산을 이야기하지만, 혁신의 인식과 확신은 분명 다른 과정이다. 새로운 비즈니스를 시작하려는 기업은 물론이거니와 정책 설계를 통해 변화를 사회 곳곳에 정착시키려는 정부 모두 이제는 기술적인 측면에서의 네트워크 효과만을 이야기해서는 부족하다. 혁신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변화가 인식을 넘어 확신으로 자리 잡는 일련의 과정에 주목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