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흘간의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24일 김포공항에 들어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귀국 첫마디도 “시장의 냉혹한 현실을 느꼈다”였다. 풍성한 출장 성과와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 부회장은 이번 출장에서 170억달러(약 20조원) 규모의 파운드리(반도체 수탁생산) 투자, 순다르 피차이 구글 최고경영자(CEO)와의 안드로이드 동맹 강화 등 성과를 안고 돌아왔다. 경제계에선 이 부회장이 앞으로 펼쳐질 반도체 기업 간 치열한 경쟁에 부담을 느낀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다.미국 정부의 반도체 기업 지원이 삼성전자에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 대만 TSMC도 미국 내에서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고, 미국 반도체 기업들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워 지원을 요구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 결정이 약육강식의 반도체 생태계에서 생존하기 위한 첫걸음이란 해석이 쏟아지는 이유다.
이번 투자는 TSMC를 추격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시장 점유율에선 TSMC와 삼성전자의 차이가 여전히 크다. 대만의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올해 2분기 기준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매출 기준)은 TSMC가 52.9%, 삼성전자는 17.3% 수준이다.
삼성전자는 기술력에선 TSMC와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받는 만큼 해볼 만한 싸움으로 판단하고 있다. 3㎚ 공정 양산은 TSMC보다 앞서 내년 상반기 시작한다. 차세대 반도체 기술로 꼽히는 ‘GAA(Gate-All-Around)’도 선제적으로 도입해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겠다는 구상이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노골적으로 삼성전자를 견제하고 나섰다. 그는 최근 미국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의 생산비가 아시아보다 30∼40% 비싸서는 안 된다”며 “이 차이를 줄여 미국에 더 크고 빠른 반도체 공장을 세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미국 정부에 호소했다.
실제 삼성전자의 투자 발표가 나오자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는 즉각 환영 입장을 내놨다. 삼성전자의 투자는 반도체 기업 유치를 위해 각종 지원책을 내놓은 바이든 행정부로서는 최대 성과물로 평가된다.
브라이언 디스 미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 위원장과 제이크 설리번 국가안보보좌관은 이날 성명을 통해 “미국의 공급망 보호는 바이든 대통령과 행정부의 최대 우선 과제”라며 “오늘 삼성의 투자 발표를 환영한다”고 밝혔다. 또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생산시설을 추가로 만들어내고 다시는 반도체 부족 사태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정부는 반도체 기업을 끌어들이기 위해 파격적인 지원안을 내놨다. 미국 상원은 지난해 제정된 ‘미국 반도체법(CHIPS for America Act)’의 후속 조치로, 반도체 제조 시설 등에 520억달러의 보조금을 지원하는 내용의 법안을 지난 6월 처리했다. 이 법안은 현재 하원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테일러시도 삼성전자에 총 10억달러(약 1조2000억원)의 대규모 세제혜택안을 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신영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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